성령강림 후 열한번째 주일 / 7월 다섯번째 주일

새로운 신앙, 나다니엘과 니고데모

요한복음 1:46-51, 3:1-8 

정해빈 목사




1. 2016731일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금요일-토요일 교회 캠프를 잘 다녀왔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축구를 했는데 아이들 체력이 어른들보다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쌩쌩한데 저는 온 몸이 쑤시고 아픕니다. 우리들은 주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만 때로는 이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따뜻한 숨결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요한복음 1장에서 5장까지의 말씀을 계속 묵상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5장까지의 말씀에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상징적이고 은혜로운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 우물가 이야기, 38년 된 병자가 연못에서 고침 받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5장까지의 말씀만 잘 이해해도 요한복음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깊이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믿음 생활을 잘하면 우리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하면 깨달음이 오고 기쁨이 옵니다.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넓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지 않고 아주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람들과 긴 시간 대화를 하시면서 그들의 생각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그냥 일방적으로 주입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시고 대화를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는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이런 주제를 가지고 깊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하셨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그들과 교감하셨고 대화를 통해서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과 대화한 후에 바로 그 자리에서 은혜 받고 생각이 바뀐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과 대화했지만 고민만 하다가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과 대화한 후에 조금씩 생각이 바뀐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대교 교육 방법 중에 하브루타라는 교수법이 있습니다. 3500년 전부터 해왔던 교수법인데 2-3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서 질문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교육 방법을 말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잠잘 때 부모가 자녀에게 책을 읽어준다든지 식탁에서 밥 먹을 때 자녀가 질문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대답하는 것이 바로 이 하브루타 교육 방법입니다. 이 교수법은 교사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첫째, 교사는 설명보다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 둘째, 학생이 틀린 답을 말해도 정답을 알려주지 말고 다시 질문으로 답한다. 셋째, 모르는 내용은 스스로 찾아보게 한다. 넷째, 아이가 스스로 사고하여 결정하고 행동하게 한다. 다섯째, 학생에게 집중하여 눈을 바라보면서 질문한다. 여섯째, 학생의 대답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칭찬한다. 일곱째, 많은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한 내용을 깊고 길게 다루는 것이 좋다. 여덟째, 다소 어려운 내용도 쉬운 용어로 질문하여 학생에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좋다.” 예수께서는 하브루타 교수법과 비슷한 방법을 이용하셔서,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사람들과 대화하시고 그들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질문과 대답을 하다보면 평소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 1장에서 5장까지의 말씀 중에서 그동안 살펴보지 않았던 두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읽은 요한복음 1장에는 나다니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립이라는 사람이 친구 나다니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 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나다니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나다니엘은 예수님이 시골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느 지역 출신이냐, 공부는 어디서 했냐, 직업이 무엇이냐, 집안은 어떻게 되냐, 이런 것 가지고 사람을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나다니엘을 보시고 그대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대에게는 거짓이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나다니엘이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질문하니까 예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말은 나다니엘이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경전을 읽고 기도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다니엘은 경건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다니엘도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는 편견/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나다니엘 처럼 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경직되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 편견없이 사람을 대하는 사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다니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의 편견을 깨트려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하늘이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째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 이야기입니다. 유대교 지도자, 예루살렘 시의원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유대교 지도자가 시골 변두리 갈릴리에서 온 사람, 유대교 성전을 비판하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나름대로 삶과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기적을 확인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셔서 민족을 해방시키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풍족하게 내려 주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니고데모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이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물은 육체의 출생을 가리킵니다. 우리들 모두는 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물에서 태어난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성령으로 한 번 더 태어나야 합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바람이 자유롭게 부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자유롭게 역사하시고, 바람이 맑고 시원하고 깨끗한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맑고 시원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기적보다 거듭남이 더 중요하다고, 외부적인 큰 기적을 꿈꾸기 이전에 그대의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잘못된 신앙, 기적만 쫓아다니는 신앙에서 벗어나서 성령을 내 안에 모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서 자유와 독립을 되찾았다 하더라도 당신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기적과 행운이 일어나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자리에서 즉시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여운으로 남아서 그를 천천히 변화시켰습니다. 니고데모는 나중에 유대교 회의에서 예수님을 옹호하기도 했고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지만 편견에 사로잡힌 나다니엘과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니고데모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두 사람 모두 유대교를 열심히 믿었지만 편견과 기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기적보다 내가 먼저 거듭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적보다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밖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보다 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바뀌는 것이 제일 큰 기적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을 편견 없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시고, 부정적인 사람을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주시고, 자유롭지 못한 사람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더 겸손하고 맑고 시원한 사람,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더 겸손하고 부드럽게, 더 넓고 깊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환영하는 사람,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New faith, Nathanael and Nicodemus

John 1:46-51, John 3:1-8


Nathanael asked, “Can anything good come from Nazareth?” Philip answered, “Come and see.” When Jesus saw Nathanael coming toward him, he said, “Here is a true descendant of our ancestor Israel. And he isn't deceitful.” “How do you know me?” Nathanael asked. Jesus answered, “Before Philip called you,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Nathanael said,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and the King of Israel!” Jesus answered, “Did you believe me just because I said that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You will see something even greater. I tell you for certain that you will see heaven open and God's angels going up and coming down on the Son of Man.” (John 1:46-51)


There was a man named Nicodemus who was a Pharisee and a Jewish leader. One night he went to Jesus and said, “Sir, we know that God has sent you to teach us. You could not work these miracles, unless God were with you.” Jesus replied, “I tell you for certain that you must be born from above before you can see God's kingdom!” Nicodemus asked, “How can a grown man ever be born a second time?” Jesus answered: I tell you for certain that before you can get into God's kingdom, you must be born not only by water, but by the Spirit. Humans give life to their children. Yet only God's Spirit can change you into a child of God. Don't be surprised when I say that you must be born from above. Only God's Spirit gives new life. The Spirit is like the wind that blows wherever it wants to. You can hear the wind, but you don't know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John 3:1-8)


John seems to symbolize Nathanael and Nicodemus as the people who believe in God but see the world through prejudice and luck by chance. Nathanael tries to judge Jesus from his background, Nazareth of Galilee, saying, “Can anything good come from Nazareth?” and Nicodemus visits Jesus to check whether Jesus is the true miracle worker or not. Nicodemus comes in darkness and does not ask Jesus who he is, but tells him what "we know" on the basis of Jesus' signs. Jesus immediately begins to undo Nicodemus' certainty. No one can see anything clearly about God and God's kingdom, Jesus tells him, without being born from above. Unless a person is born into the worldview of God, that person cannot enter the kingdom. Jesus urged him that he must be born not only by water but by the Spirit. Whereas water indicates a physical birth, spirit points out a spiritual birth. Today’s passage shows that the more we believe in God, the more we ought to be the person of spirit, the person of hospitality and fairness, welcoming the spirit of liberty and joy.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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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열번째 주일 / 7월 네번째 주일

새로운 신앙, 내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

요한복음 4:13-15, 5:1-9 

정해빈 목사





1. 요즘 우리는 요한복음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매 장 마다 상징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1장에는 예수님이 나다니엘을 부르는 이야기가 나오고 2장에는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3장에는 시의원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5장에는 예수님이 베드자다/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1장, 2장, 3장, 4장, 5장, 요한복음을 한 장씩 읽어갈 때마다 매 장마다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큰 감동과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바깥쪽에 있는 베드자다/베데스다 연못을 지나가시다가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에는 가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물을 휘저어 놓을 때 제일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3절-4절.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가로가 쳐져 있다는 것은 이 말씀이 나중에 추가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휘저을 때 가장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전설로 그렇게 믿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설이라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전설을 믿으면 그 전설은 사실이 됩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믿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이 내 삶에 영향을 주고 믿음이 내 삶을 이끌고 갑니다.


예수께서 38년간 누워있는 병자를 보시고 “낫기를 원합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병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기 때문에, 나를 들어서 연못에 집어넣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고침 받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1등 하면 고침 받는 것이고 1등하지 못하면 고침 받지 못합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무한경쟁시대, 1만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1등만 살아남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고 가인과 아벨을 지으시고 형으로 하여금 동생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힘 센 사람, 동작이 빠른 사람, 1등만 살아남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답고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위급한 순간이 왔을 때 가장 먼저 약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이타닉 호가 대서양에서 침몰했을 때 선장과 선원들은 노약자/여성/어린이들을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리게 했고 선장과 선원들은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있었습니다. 세월호 사고 때 보는 것처럼, 배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할 선장과 선원들이 제일 먼저 배에서 내리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동작이 빠르고 눈치가 빠른 사람만 살아남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잔인하고 차가운 세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세상을 약자를 배려하는 세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1등만 살아남는 세상이 아니라 2등도, 3등도 살아남고 꼴찌도 살아남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를 향해서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연못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물이 움직일 때 1등을 할 수 있을까, 누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그 자리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으면 물에 빨리 들어갈 생각, 어떻게 해서든지 경쟁해서 1등할 생각만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런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바깥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물속에 들어가야만 고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즉시 여기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옆 사람과 싸우고 경쟁하지 않아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든지 고침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치료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2.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이 병자를 향해서 제일 먼저 “낫기를 원합니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다보면 낫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포자기 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정말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는 주님도 도와줄 수 있지만 낫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주님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 그냥 일방적으로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낫고자 하는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그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낫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낫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료의 역사는 나의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믿음을 보시고 나를 도와주십니다. 나에게 믿음이 없으면 주님도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정말 낫기를 원합니까?“ 물으셨습니다. 그 사람 안에 낫고자 하는 믿음이 있는 지를 확인하시고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들어야만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는 바깥 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 안에서 믿음이 움직여야, 바깥 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 있는 믿음의 물이 움직여야 고침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깥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믿음의 물이 움직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서 믿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바깥 연못 물이 움직여야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믿음이 움직여야 내 병이 낫을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말씀에서 4장 말씀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입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가서 내 안에 있는 믿음을 깨워 줍니다. 그러면 내 안에 있는 믿음이 스스로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펌프에서 물을 퍼 올리기 위해 마중물 한 바가지를 붓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해야 물이 밑에서 올라옵니다.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마중물이 되어서 내 안에 있는 믿음을 깨워주고 나의 믿음을 스스로 솟아나는 샘물로 만들어 줍니다. 내 안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샘물이 나오면 더 이상 물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샘물이 없으면 물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 하고 바깥 연못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38년 된 병자처럼 그렇게 소극적으로, 1등이 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삶을 살지 않으려면 내 안에서 샘물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씀 묵상도 열심히 하고 좋은 책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물을 얻으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는 샘물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먹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무언가에 중독이 되는 것은 마음이 허전하고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허전하고 목마르기 때문에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샘물이 만들어 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내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통해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스스로 샘물이 솟아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이웃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만나주시고 1등하기 위해 다투고 경쟁하지 않아도 내 안에 믿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기쁘게 살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깨어나고 스스로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New faith, spring of water in me

John 4:13-15, 5:1-9


The Samaritan woman said to him, ‘How is it that you, a Jew, ask a drink of me, a woman of Samaria?’ Jesus answered her, ‘If you knew the gift of God, and who it is that is saying to you, “Give me a drink”, you would have asked him, and he would have given you living water.’ The woman said to him, ‘Sir, you have no bucket, and the well is deep. Where do you get that living water? Are you greater than our ancestor Jacob, who gave us the well, and with his sons and his flocks drank from it?’ Jesus said to her, ‘Everyone who drinks of this water will be thirsty again, but those who drink of the water that I will give them will never be thirsty. The water that I will give will become in them a spring of water gushing up to eternal life.’ The woman said to him, ‘Sir, give me this water, so that I may never be thirsty or have to keep coming here to draw water.’ (John 4:9-15)


After this there was a festival of the Jews, and Jesus went up to Jerusalem. Now in Jerusalem by the Sheep Gate there is a pool, called in Hebrew Beth-zatha, which has five porticoes. In these lay many invalids—blind, lame, and paralysed. One man was there who had been ill for thirty-eight years. When Jesus saw him lying there and knew that he had been there a long time, he said to him, ‘Do you want to be made well?’ The sick man answered him, ‘Sir, I have no one to put me into the pool when the water is stirred up; and while I am making my way, someone else steps down ahead of me.’ Jesus said to him, ‘Stand up, take your mat and walk.’ At once the man was made well, and he took up his mat and began to walk. (John 5:1-9)


John chapter 5 reports that there was a man who had been ill for 38 years. At that time people believed that sometimes an angel would come down and stir up the waters and the first one into the pool after each such disturbance would be cured. But this man could not dive into the pool first since he was ill for a long time. Jesus said to him, “Do you want to be made well?” and ordered him to stand up, take his mat, and walk. Jesus did not acknowledge this tradition and showed him that God is good and mercy, and heals everyone who has a faith on God. This story reminds us of the dialogue between Jesus and the Samaritan woman. “Everyone who drinks of this water will be thirsty again, but the water that I will give will become in them a spring of water gushing up to eternal life.” The word of Jesus awakens our faith and turns it into a spring of water that won’t dry up again. Jesus woke up the Samaritan woman and the sick man and made them live positively as the people of God, not relying anymore on prejudice or wrong legend. Jesus seems to say, “Do not wait for the outside water be stirred up, but try to make your inside water/faith be raised up.”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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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아홉번째 주일 / 7월 세번째 주일

새로운 신앙, 야곱의 우물을 넘어서

요한복음 4:12-19

정해빈 목사





1.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상징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장에는 저 유명한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혼인 잔치에 가셨다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보시고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몇 달 전에 이 말씀을 가지고 2주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나오고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한 우물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도 굉장히 상징적이고 감동적이어서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한 번 더 설교하려고 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와 우물가 이야기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갈등으로 시작했다가 기쁨으로 끝이 납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가 나중에 더 좋은 포도주가 나왔고 예수님을 경계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나중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 모두 결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였고 우물가는 옛날에 신랑 신부가 처음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대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부정한 여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물가 이야기의 주제는 회개가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여기 말하는 다섯 남편은 다섯 종교를 가리킵니다. 앗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그리스 같은 나라들이 쳐들어와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믿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렇게 다섯 남편은 다섯 제국의 종교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는 사마리아 땅에 살았던 다섯 민족의 종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열왕기하 1724, 이스라엘 자손을 사마리아에서 쫓아낸 앗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에 살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사마리아를 자기들의 소유로 삼았으며 이스라엘 성읍들 안에 정착하여 살았다.” 앗시리아 왕이 사마리아 땅을 정복한 후에 다섯 민족을 사마리아 땅에 살게 했습니다. 다섯 민족이 사마리아 땅에 들어올 때 자신들의 종교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다섯 민족이 가지고 온 종교들을 섬겨야만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일제 시대에 억지로 신사 참배를 해야만 했습니다. 신사는 일본 민속 신앙을 말합니다. 제국들은 늘 이렇게 자신들의 종교를 식민지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여러 종교들을 섬겨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참된 자유와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종교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제국을 위한 종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슬픈 역사를 정확하게 보시고 당신들에게 여러 종교가 있었지만 당신들은 아직 참된 기쁨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들의 아픔을 정확하게 말씀하시자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 우리에게 우물을 파 준 야곱보다 더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슬픈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우리들은 야곱이 파 준 우물을 먹고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누구이기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줄 수 있다고 말합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지금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야곱이 판 우물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자신들이 야곱 10지파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야곱이 판 우물에서 오랫동안 물을 길러 마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물은 영적인 가르침/종교를 가리킵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큰 자입니까? 야곱의 우물보다 더 좋은 물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이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런 말들을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를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전통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쪽 사람들에게 다윗과 다윗의 전통/우물이 있었다면 북쪽 사람들에게는 야곱과 야곱의 전통/우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전통에 대해 자부심이 너무 강하면 다른 전통과 충돌하기가 쉽습니다. 나의 전통이 최고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전통을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이런 갈등을 겪어 왔습니다.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갈등,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갈등, 개신교와 카톨릭과의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갈등, 흑인과 백인과의 갈등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야곱의 전통이 당신들에게 자부심을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지금 당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갈등/반목/남쪽 사람들과의 충돌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그 전통이 참된 기쁨과 자유를 주지 못하고 반대로 갈등과 반목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보다 더 깊고 넓으신 하나님, 모든 생명을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 남쪽도 사랑하시고 북쪽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요한복음이 말하는 우물은 종교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종교라는 우물에서 영적인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의지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를 영적으로 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신라/고려 시대에는 불교라는 우물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고 선행을 닦고 마음을 깨끗이 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 시대 땅의 대부분은 불교가 차지했고 승려가 너무 많아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유교가 영적인 우물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유교/성리학을 공부한 젊은 학자들이 함경도 변방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는 이성계를 찾아서 지금 고려는 불교도 타락했고 귀족들도 타락했으니 새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을 따라서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平天下) 나를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케 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유교도 조선 말기에는 양반들이 횡포를 부리고 시대의 변화에 둔감해서 사람들에게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기독교가 새로운 우물이 되었습니다. 서양 종교를 통해서 보호받고 싶어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기독교의 사랑/평등/박애의 가르침이 일제 시대에 마음이 허전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주었습니다. 조선 시대 천시받는 여성들, 백정들, 평민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받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제 시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개신교/카톨릭)라는 우물에서 일상 생활에 필요한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타락하고 교만해서 저 옛날 불교와 유교가 시들해진 것처럼, 기독교도 점점 우물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기독교인이 10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가나안 교인이라고 부릅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말하면 안나가가 됩니다. 왜 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을까요? 그것은 교회가 영적인 우물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교회는 고통받는 국민들의 아픔을 모른 체하고 교회 성장에만 몰두합니다. 교회가 폐쇄적이고 상식에 맞지 않는 설교를 하니까 많은 현대인들/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현상은 기독교가 참 우물의 역할,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참 기쁨과 자유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개의 우물/종교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종교를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우물/종교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믿는 우물/종교가 세상에 기쁨과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세계 여기저기서 계속 테러가 일어나고 있고 종교간의 갈등, 국가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자기의 전통/종교/우물을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자기의 우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갈등을 일으키는 우물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를 일으키는 우물을 만나야 합니다. “당신은 야곱의 우물보다 더 큽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십시오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나의 신앙이 세상의 갈등을 해결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를 주는 그런 신앙이 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야곱의 우물보다 더 깊고 넓으신 하나님, 모든 생명을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New faith, beyond Jacob’s well

John 4:12 - 19


Are you greater than our ancestor Jacob who gave us the well and with his sons and his flocks drank from it?’ Jesus said to her, ‘Everyone who drinks of this water will be thirsty again but those who drink of the water that I will give them will never be thirsty. The water that I will give will become in them a spring of water gushing up to eternal life.’ The woman said to him, ‘Sir, give me this water so that I may never be thirsty or have to keep coming here to draw water.’ Jesus said to her, ‘Go, call your husband and come back.’ The woman answered him, ‘I have no husband.’ Jesus said to her, ‘You are right in saying, “I have no husband”; for you have had five husbands and the one you have now is not your husband. What you have said is true!’ The woman said to him, ‘Sir, I see that you are a prophet. (John 4:12-19)


In John’s gospel, this woman symbolizes all the Samaritans. That the woman had five husbands means the Samaritans had to serve five empires’ religion. Jesus does not say “Go and sin no more!” as he does to the woman accused of adultery (8:1-11). Instead Jesus speaks to her of worship in spirit and truth; not worship confined to an exclusionary zone based on gender, or ethnicity, or even geography and conventional morality, but worship including her: “God is Spirit, and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truth” (4:24). Five husbands do not mean real people but symbolize five empires and religions who had occupied their lands in the past. They had to worship the gods of empires whenever these countries controlled their lands. Spiritually speaking, they were isolated, rejected, and discriminated. They had been thirsty for not only political freedom but also spiritual comfort and joy for a long time. So Jesus reached out directly to the people of these land who had been suffering from oppression and discrimination, and showed to them God's unconditional love.


In the scriptures, the well has been the place in which people meet and give hospitality to those in need. In the Gospel of John, Jesus met a woman in the well, the place of deep dialogue and reconciliation. “Are you greater than our ancestor Jacob who gave us the well and with his sons and his flocks drank from it?” This question shows that the Samaritans were very proud of the well of Jacob. Whereas the people of Judea were proud of David and his tradition, the Samaritans were proud of Jacob and his heritage. But Jesus said to them, “Everyone who drinks of this water will be thirsty again but those who drink of the water that I will give them will never be thirsty.” Each religion has their wells, teachings, and wisdoms. People get spiritual water, grace and wisdom, from their own religions/wells. But Jesus warns that once we are attached to our own wells, we feel thirsty again and find ourselves having trouble with other people. Jesus teaches us that God loves all the people including Judea and Samaria and God of love is bigger than the well of Jacob in history. We are encouraged to welcome God of love and grace beyond our own historical religion.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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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여덟번째 주일 / 7월 두번째 주일

우물가에서 일어난 일, 새로운 만남

요한복음 4:13-24

정해빈 목사





1. 오늘 설교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우물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깊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한 장소가 우물가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날 중동에서는 물이 귀했기 때문에 우물가가 중요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렀고 우물가에서 사람을 만났으며 우물가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때로는 우물가에서 사랑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커피숍에서 사람을 만난다면 옛날 젊은이들은 우물가에서 만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의미있고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우물가 이야기입니다. 신약 성경에 있는 4가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뜻이 깊은 복음서가 요한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영적인 메시지/상징이 많기 때문에 그 영적인 메시지/상징을 알아야만 요한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기적 속에는 어떤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기적을 그냥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적/표징(Sig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냥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무언가 깊은 뜻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이 기적을 사용하셨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표적/표징(Sign)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어떤 큰 기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주로 우물가에서 신랑이 신부를 찾았습니다. 성경에도 우물가에서 신랑이 신부를 찾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종에게 내 고향으로 가서 이삭의 신부를 찾아 데리고 와라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종은 낙타에 선물을 싣고 먼 길을 떠나 나홀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마침 우물가가 있었습니다. 종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합니다. 주님, 내가 물을 길으러 온 처녀들에게 물을 좀 주십시오 하고 말할 때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과 낙타들에게도 물을 주는 처자가 있으면 그 처자가 바로 주님이 이삭의 아내로 정한 여인인줄로 알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 처녀들에게 말을 걸었더니 리브가라는 처녀가 종과 일행과 낙타들에게 친절하게 물을 주었습니다. 이 종은 리브가를 마음에 두고 리브가의 집에 가서 자초지정을 이야기하고 선물을 준 후에 리브가를 이삭의 신부 감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이 아니라 고향 땅에서 며느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종을 고향으로 보냈는데 마침 아브라함의 친척인 리브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친척일 뿐만 아니라 나그네와 동물에게 친절하게 물을 주는 것을 보면서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신랑이 우물가에서 직접 신부를 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가에서 주인 아들의 신부를 찾았습니다.


우물가 이야기는 성경에 계속 나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종을 통해서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도 형 에서를 피해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가다가 역시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이 양떼를 몰고 우물가에 오자 그를 껴안고 라헬의 아버지가 자기 외삼촌이라고 말을 해 줍니다. 결국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다가 라헬과 결혼하게 되는데 야곱이 라헬을 처음 만난 곳도 역시 우물가였습니다. 우물가 세 번째 이야기는 모세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모세가 살인을 저지르고 이집트 왕 바로를 피해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우물가에 앉아 있는데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이 우물가로 와서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자들이 와서 딸들을 쫓아버렸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딸들을 도와서 양떼에게 물을 먹이게 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초대를 받게 되었고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해서 광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2. 이러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물이 주는 몇 가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장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가 우물가입니다. 첫째로 우물은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사막에서는 우물을 만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몇날 며칠 사막을 걷다가 우물/오하시스를 만나면 감격해서 소리를 지릅니다. 만약 우리들도 몇날 며칠 사막을 걷다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우물을 만난다면 감격해서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둘째, 우물가는 남녀가 만나는 곳입니다. 신랑이 신부 감을 찾는 곳이고 신랑 부모가 며느리를 찾는 곳입니다. 우물가는 남녀가 눈이 맞는 곳이고 사랑이 싹트는 곳입니다. 남녀가 만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셋째로 우물가는 나그네를 환대/대접하는 곳이고 인정을 베푸는 곳입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과 그 일행에게 물을 먹여 주었고 라헬은 야곱에게 물을 먹여 주었습니다. 이드로의 딸 십보라는 모세에게 물을 먹여 주었고 모세는 그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나그네를 환대/대접하고 인정을 베푸는 곳이 우물가입니다. 우물가는 이렇게 생명, 사랑, 환대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말씀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대화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물가에서 생명, 사랑, 환대가 일어난다고 말씀드렸는데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우물가에서 깊은 대화가 일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여행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멀리 돌아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가셔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실 물을 달라고 하니까, 이 여인이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질문을 했습니다. 다윗/솔로몬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 12 지파 가운데서 10 지파가 따로 독립해서 북이스라엘을 세웠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남유다를 세웠습니다. 남유다가 다윗의 후손임을 주장하니까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이삭/야곱, 특히 야곱의 후손임을 주장했습니다. 야곱의 12 아들에서 12 지파가 나왔는데 10 지파가 모였으니까 자신들이 바로 야곱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남유다가 다윗의 후손을 강조하니까 북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을 강조했습니다. 다윗이 더 위대하다 아니다 야곱이 더 위대하다 서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했습니다. 남유다가 예루살렘을 강조하니까 북이스라엘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사마리아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남유다가 성전을 강조하니까 북이스라엘은 산 위에다가 따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서로 대결하면서 사사건건 자존심 경쟁을 벌였습니다. “유대 사람이 어떻게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2가지 장벽을 깨트리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장벽, 남자와 여자의 장벽을 깨트리셨습니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진실한 대화, 사랑과 화해의 대화를 하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말씀하시니까? 이 여인이 그런 물을 나에게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예수님이 여인에게 그대의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그대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상징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섯 남편이 있었다는 말은 이전에 다섯 나라, 다섯 종교가 사마리아를 지배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 나오는 남편은 종교/신을 가리킵니다. 구약 성경에 바알 종교가 나오는데 바알이라는 말이 남편을 가리킵니다. 아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그리스 같은 나라들이 사마리아를 지배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믿도록 강요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시리아가 쳐들어왔을 때는 아시리아의 종교를 남편으로 섬겼고 페르시아가 쳐들어왔을 때는 페르시아의 종교를 남편으로 섬겼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종교를 섬겼지만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같은 동족으로부터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고통받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찾아가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된 기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셨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마음이 허전하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사랑의 대화, 화해의 대화, 깨달음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우물가 이야기가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우물가의 만남, 우물가의 격려, 우물가의 깨우침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음 주일에 우물가 이야기를 한번 더 살펴보겠습니다. 아멘.


New encounter in the wells

John 4:13 - 24


He left Judea and started back to Galilee. But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So he came to a Samaritan city called Sychar near the plot of ground that Jacob had given to his son Joseph. Jacob’s well was there and Jesus, tired out by his journey, was sitting by the well. It was about noon. A Samaritan woman came to draw water and Jesus said to her, ‘Give me a drink’. His disciples had gone to the city to buy food. The Samaritan woman said to him, ‘How is it that you, a Jew, ask a drink of me, a woman of Samaria?’ Jews do not share things in common with Samaritans. Jesus answered her, ‘If you knew the gift of God and who it is that is saying to you, “Give me a drink”, you would have asked him and he would have given you living water.’ The woman said to him, ‘Sir, you have no bucket and the well is deep. Where do you get that living water? (John 4:3-11)


Are you greater than our ancestor Jacob who gave us the well and with his sons and his flocks drank from it?’ Jesus said to her, ‘Everyone who drinks of this water will be thirsty again but those who drink of the water that I will give them will never be thirsty. The water that I will give will become in them a spring of water gushing up to eternal life.’ The woman said to him, ‘Sir, give me this water so that I may never be thirsty or have to keep coming here to draw water.’ Jesus said to her, ‘Go, call your husband and come back.’ The woman answered him, ‘I have no husband.’ Jesus said to her, ‘You are right in saying, “I have no husband”; for you have had five husbands and the one you have now is not your husband. What you have said is true!’ The woman said to him, ‘Sir, I see that you are a prophet. (John 4:12-19)


"You have had five husbands and the one you have now is not your husband." John uses here many metaphors to explain who Jesus is and why Jesus is willing to invite the Samaritans into the new realm of the Kingdom of God. Five husbands do not mean real people but symbolize five empires and religions who had occupied their lands in the past. They had to worship the gods of empires everytime these countries controlled their lands. They were not only ruled over by these empires, but also held in contempt by the Jewish people. Spiritually speaking, they were isolated, rejected, and discriminated. They had been thirsty for not only political freedom but also spiritual comfort and joy for a long time. So Jesus reached out directly to the people of these land who had been suffering from oppression and discrimination, and showed to them God's unconditional love. It happened in the well. In the scriptures, the well becomes the place where people meet and give hospitality to those in need. In the Gospel of John, the well becomes the place of deep dialogue and reconciliation. It happened in the well, the place of giving water physically and spiritually.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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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일곱번째 주일 / 7월 첫번째 주일

사자와 들나귀, 야곱이 걸어온 길

창세기 49:8-9, 22-26

정해빈 목사





1. 오늘은 우리 교회가 2016년 여름 야외 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지난 7월 1일은 제149주년 캐나다 건국기념일(Canada Day)이었고 오늘은 하반기가 시작되는 7월 첫번째 주일입니다. 나무와 잔디와 시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공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야외 예배를 맞아서 “사자와 들나귀, 야곱이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에서가 먼저 나왔고 야곱이 그 다음에 나왔습니다. 야곱은 첫째로 태어나고 싶어서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첫째 아들이 집안의 대부분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첫째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야곱은 본래 꿈과 욕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첫째로 태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형이 빨리 못나오게 발뒤꿈치를 붙잡았지만 어쩔 수 없이 둘째 아들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5장을 보면 유명한 팥죽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 에서는 성격이 급하고 밖에서 사냥하는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성격이 차분하고 집에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서는 생각하지 않고 몸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 꾀를 부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 에서는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별로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들에 나가서 사냥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장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서에게 “내가 팥죽을 끓여 줄 터이니 내게 장자권을 넘기라”고 말했습니다. 배가 고픈 에서는 장자권을 야곱에게 넘기게 되었고 나중에 야곱은 아버지가 운명할 때에 에서로 위장해서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에서는 나중에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야곱을 죽이려고 하였고 야곱은 화가 난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라는 사람이 주어진 운명에 따라 살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운명이 있는데 그냥 운명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운명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운명은 아무리 바꾸고 싶어도 내 힘으로 쉽게 바꿀 수가 없습니다. 야곱처럼 첫째가 아니라 둘째나 막내로 태어나서 형이나 언니 옷을 물려받으면서 자란 사람은 왜 나는 첫째로 태어나지 않고 막내로 태어났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사람은 왜 나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좀 더 예쁘고 잘 생긴 모습으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태어난 환경/집안/배경이 더 좋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운명이라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날에는 어떻게 태어나느냐 보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태어난 그대로 평생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첫째로 태어났으면 첫째로 살아야 하고 둘째로 태어났으면 둘째로 살아야 합니다. 노비의 자식은 노비로 살아야 합니다. 조선 시대 허균이 쓴 [홍길동]을 보면 홍길동이 서자,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과거시험도 볼 수 없고 무과 시험도 볼 수 없어서 나중에 의적이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옛날에는 한번 운명이 정해지면 그대로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운명에 저항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싶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 아들, 장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인생에서 성공하고 싶은 의지/목표/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잔꾀를 부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했습니다. 주어진 인생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자기 인생을 개척하려는 모습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2.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 간 야곱은 거기서도 7년간 열심히 일해서 외삼촌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원래는 둘째 딸 라헬을 사랑했는데, 결혼식을 치르고 보니 큰 딸 레아가 방에 누워있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항의하니까 라반은 우리 지역에서는 큰 딸이 먼저 결혼해야만 하는 전통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7년 일해서 큰 딸과 결혼했으니 7년 더 일하면 작은 딸을 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야곱은 할 수 없이 7년 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여기서 또 한 번 크게 절망을 합니다. 둘째 아들이라는 운명에 저항해서 어렵게 장자권을 빼앗고 여기로 왔는데 여기에 와보니 둘째 딸과 결혼하고 싶어도 첫째 딸과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운명을 또 만났습니다. 그 당시 사회의 제도/관습/문화가 야곱의 뜻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7년을 머슴 같이 일하고 나서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둘째 아들로 살지 않고 적극적으로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결혼은 첫째 딸과 해야 한다는 운명을 따르지 않고 더 노력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렇게 야곱은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꿈을 이루었고 아브라함/이삭의 뒤를 이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첫째 부인 레아와 둘째 부인 라헬 및 다른 부인들을 통해서 12지파를 낳았습니다. 야곱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12지파의 실제적인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9장 말씀을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자신의 12 아들을 축복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 부인 레아에게서 난 대표적인 아들이 유다였고 둘째 부인 라헬에게서 난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야곱은 첫째 부인에게서 난 유다에게 너는 사자 새끼 같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다야, 너는 사자 새끼 같을 것이다. 너는 움킨 것을 찢어 먹고 굴로 되돌아갈 것이다. 엎드리고 웅크리는 모양이 수사자 같기도 하고 암사자 같기도 하니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으랴!” 둘째 부인에게서 난 요셉에게는 너는 들나귀와 같고 샘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샘 곁에 있는 들망아지, 언덕 위에 있는 들나귀다. 사수들이 잔인하게 활을 쏘며 달려들어도 사수들이 적개심을 품고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도 요셉의 활은 그보다 튼튼하고 그의 팔에는 힘이 넘친다.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에서 내리는 복과 아래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복과 젖가슴에서 흐르는 복과 태에서 잉태되는 복을 베푸실 것이다.” 여기 나오는 사자는 야곱의 인생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 사자처럼 살았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들었고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표를 향해 달려들다 보니 얻는 것도 있었지만 잃어버린 것도 많았습니다. 너무 자기 목표만을 위해서 살다보니 가족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가족 간에 비극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다도 자기와 비슷하게 사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사자처럼 살지 않고 들나귀처럼 살았습니다. 연약한 들나귀처럼 살았지만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야곱은 나이가 들면서 사자보다 들나귀가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들나귀는 약해서 쉽게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아무도 들나귀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요셉이 그랬습니다. 사냥꾼들이 달려들어도 하나님이 도우시니 아무도 요셉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야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사자 같은 용기와 능력은 있었으나 들나귀와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야곱에게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운명을 바꾸어서 성공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발견합니다. 야곱은 도전하는 사람이었고 씨름하고 경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야곱의 열정은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자 같은 유다가 아니라 들나귀 같은 요셉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사자 같은 사람이 아니라 들나귀 같은 사람입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온유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잔꾀를 부리지 말고, 힘들고 어려워도 바르고 진실되게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과 땅에서 올라오는 복으로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Lion and donkey, Jacob's life

Genesis 49:8-9, 22-26


Jacob called his sons together and said: My sons, I am Jacob, your father Israel. Come, gather around, as I tell your future. Judah, you will be praised by your brothers; they will bow down to you, as you defeat your enemies. My son, you are a lion ready to eat your victim! You are terribly fierce; no one will bother you. You will have power and rule until nations obey you and come bringing gifts. You will tie your donkey to a choice grapevine and wash your clothes in wine from those grapes. Your eyes are darker than wine, your teeth whiter than milk. (Genesis 49:1-2, 8-12)


Joseph, you are a fruitful vine growing near a stream and climbing a wall. Enemies attacked with arrows, refusing to show mercy. But you stood your ground, swiftly shooting back with the help of Jacob's God, the All-Powerful One-- his name is the Shepherd, Israel's mighty rock. Your help came from the God your father worshiped, from God All-Powerful. God will bless you with rain and streams from the earth; he will bless you with many descendants. My son, the blessings I give are better than the promise of ancient mountains or eternal hills. Joseph, I pray these blessings will come to you, because you are the leader of your brothers. (Genesis 49:22-26)


Jacob called Judah a lion's whelp and said that his brothers will praise him and his hand will be on the neck of his enemies. Judah, who was born from Jacob's first wife Leah, symbolizes Jacob's dauntlessness and defiant spirit. Inheriting his father's purpose driven life, Judah became an actual leader of his brothers. Whereas Jacob called Judah a lion, he called Joseph, who was born from Jacob's second and beloved wife Rachel, a donkey or a fruitful vine growing near a stream. Although the archers fiercely attack him, the hands of the Mighty One of Jacob and the name of the Shepherd, the Rock of Israel, will keep him. Jacob realized in his old age that a donkey or a vine growing near a stream get God's favour more than a lion. God chose not Judah, but Joseph to be in the line of ancestors of faith, following Abraham, Isaac, and Jacob. A donkey is weak but gentle and mild. Nobody can attack a donkey because God keeps him. Today's scripture says that not a lion-like person but a donkey or a vine-like person will be the person of Go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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