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아홉번째 주일 / 10월 다섯번째 주일

창조절, 하나님의 정치와 복지

출애굽기 16:11 – 21

정해빈 목사





1. 연합신앙강좌 강사로 오신 김경재 목사님께서 지난 토요일 강연에서 이런 예화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께서 미국 한인 교회에서 강연을 하려고 강대상에 올라와 보니 미국 성조기가 예배당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함 선생께서 강연하기 전에 깃발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알기로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예배당에 국가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국가를 섬기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캐나다는 그렇지 않지만 미국을 가면 대부분 예배당에 미국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예배당에 국가 깃발이 있는 것이 좋을까요 없는 곳이 좋을까요?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서도 교회를 가리켜서 땅에 있지만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땅에 있기 때문에 땅의 영향을 받습니다. 나라의 법과 제도를 지켜야 하고 국가 질서에 협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지 국가를 섬기는 곳이 아닙니다. 정부가 하나님 뜻에 맞게 일을 하면 교회는 정부에 적극 협력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하나님 뜻에 맞지 않게 일을 하면 교회는 정부에 반대하고 저항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땅 위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곳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관점에서 국가와 정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당에 국가 깃발이 걸려 있는 곳은 옳지 않습니다. 참다운 교회는 세상 권력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 권력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에서 국가 권력에 협조할 수도 있고 때로는 충고할 수도 있고 때로는 불의한 권력에 저항도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가 적극적으로 세상 일에 대해서 의견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세상 권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교회가 국가가 너무 가까운 것은 좋지 않습니다. 교회는 정부가 바른 길을 걸어 가도록 협력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 발짝 떨어져서 국가 권력이 하나님 뜻에 맞게 잘 운영되고 있는지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감시도 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 39권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 왕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들이 하나님 뜻에 맞게 나라를 운영했는지를 기록한 책이 구약 성경입니다. 열왕기상, 열왕기하 같은 책들은 조선 시대의 조선왕조실록처럼 왕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일을 했는지를 연대기 순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특히 예언자들의 책을 보면,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미가 같은 책들을 보면 예언자들은 왕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잘못된 길을 갔을 때 왕들을 꾸짖었고 왕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때로는 왕들의 미움을 받아서 쫓겨나기도 했고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구약 성경 대부분의 책들이 그 시대의 정치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정의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왕들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기록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정의를 부르짖는 예언자들의 책을 잘 읽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위로하시는 말씀들, 부드럽고 달콤한 말씀들만 찾아서 읽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는 말씀들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높은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정부가 하나님 뜻에 맞게 국가 권력을 사용하는지를 잘 살펴보고 감시해야 합니다. 때로는 정부를 위해 기도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정부를 비판하고 잘못된 정부에 저항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 뉴스를 보면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한국 정치 사회가 선진국처럼 되면 좋겠는데 자꾸 이상한 뉴스가 들려옵니다. 대통령은 허수아비이고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을 조종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개성 공단 폐쇄하는 것도 자기가 결정하고 장관 임명하는 것도 자기가 결정합니다. 대통령 연설문을 빨간 펜으로 교정을 합니다. 하얀 옷 입어라 그러면 대통령이 하얀 옷 입고 빨간 옷 입어라 그러면 대통령이 빨간 옷을 입습니다. 자기 딸을 부정 입학시킨 것이 탄로 나서 대학 총장이 사퇴하기도 했습니다. 메모 한 장도 청와대 바깥으로 빠져 나가면 안 되는데 외교/안보 문건을 거의 매일 받아보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직원들이 수백 명인데 그 사람들은 다 허수아비였습니다. 대통령은 대기업 회장들을 숙소로 불러서 재단을 만들었으니 돈을 내라고 협박했고 그렇게 해서 모은 800억 원이 최순실에게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버지 최태민, 딸 최순실은 최면술을 거는 사이비 종교 무당들입니다. 명색이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지금 무당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정신이 허약하면 무당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정신이 나약한 사람은 귀신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 중에도 무당을 찾아서 이사를 언제 갈까요?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인들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국가 지도자는 사람이 무당 꼭두각시 노릇을 했으니 기가 막입니다. 국가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합니다. 불쌍해서 뽑아주고 같은 지역이니까 뽑아주면 안됩니다.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정신과 능력이 되는지를 잘 살펴보고 뽑아야 합니다. 한국이 상식이 통하고 민주주의가 통하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20세기를 대표하는 성서학자 중에 왈터 부르거만(Walter Brueggemann) 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콜롬비아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쳤습니다. 이 분이 몇 년 전에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 (Journey to the Common Good)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받던 히브리/이스라엘 사람들 해방시키시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셨다, 우리들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사회경제학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편적인 복지를 베푸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 가면 피라밋이 있는 것처럼 사회 구조가 피라밋처럼 되어 있습니다. 제일 밑에 가장 숫자가 많은 노예들이 있고 제일 위에 파라오/바로 왕이 있습니다. 이집트 사회는 바로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노예들을 다스리는 사회였습니다. 창세기/출애굽기를 보면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대비하기 위해 곡식을 사 모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곡식을 사 모은 후에 기근이 들자 사람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이집트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떨어지자 곡식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바로의 종이 되었습니다. 결국 온 세상의 돈이 다 요셉에게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셉이 흉년을 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집트 경제가 바로와 총리가 모든 것을 독점하는 사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476절을 보면 요셉은 밭에서 거둔 것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요셉은 총리직을 이용해서 자기 동포들을 잘 먹여 살렸지만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요셉이 만든 법 때문에 요셉의 후손들은 땅을 잃어버리고 이집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만든 독점 법이 결국 동포들에게 부메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로 고통당하는 히브리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집트와 광야의 차이점을 잘 보아야 합니다. 바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곳이 이집트라면 광야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혜택을 보는 곳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히브리 사람들은 광야에서 누구나 똑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빵을 먹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 복지입니다. 만나를 먹을 만큼만 광주리에 담아라, 내일 먹을 것은 내일 줄 터이니 따로 저장하지 말아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만나를 저장하고 그 다음날 보았더니 저장한 것이 다 썩었습니다. 나 혼자 많이 먹으려고 저장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몰래 쌓아두지 말고 다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억압받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여라, 이것이 하나님의 정치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여라, 이것이 하나님의 복지입니다. 구약 성경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정치와 복지를 기록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치, 하나님의 복지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캐나다가 지금도 복지가 잘 되어 있지만 지금보다 더 보편 복지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이 지구촌 전체에 하나님의 정치와 복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복지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reation, God’s common good

Exodus 16:11 21


Moses turned to Aaron and said, "Bring the people together, because the LORD has heard their complaints." Aaron was speaking to them, when everyone looked out toward the desert and saw the bright glory of the LORD in a cloud. The LORD said to Moses, "I have heard my people complain. Now tell them that each evening they will have meat and each morning they will have more than enough bread. Then they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their God." That evening a lot of quails came and landed everywhere in the camp, and the next morning dew covered the ground. After the dew had gone, the desert was covered with thin flakes that looked like frost. (Exodus 16:9-14)


The people had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and they started asking each other, "What is it?"Moses answered, "This is the bread that the LORD has given you to eat. And he orders you to gather about two quarts for each person in your family that should be more than enough." They did as they were told. Some gathered more and some gathered less, according to their needs, and none was left over. Moses told them not to keep any overnight. Some of them disobeyed, but the next morning what they kept was stinking and full of worms, and Moses was angry. Each morning everyone gathered as much as they needed, and in the heat of the day the rest melted. Amen. (Exodus 16:15-21)


In his recent book, [Journey to the Common Good], Brueggemann presents a very different view of the Joseph story than the one we usually hold to. Joseph solidified Pharaoh’s power and enslaved the people, manipulating the economy to concentrate wealth and power in the hands of a few. The situation deteriorates and God intervenes. The divine alternative comes into being through Moses’ dream of a people no longer exploited or suffering but living in the abundance of shared generosity which is the centre of God’s dream. The bread of the wilderness, the bread that God gives us to eat, is a very different sort of bread. It is the bread of God’s generosity, a gift of abundance that breaks the deathly pattern of anxiety, fear, greed and anger, a miracle that always surprises because it is beyond our capacity of expectation. Brueggemann points out that is this bread that fills the Israelites as they stand at Mt Sinai to receive God’s commands, commands that voice God’s dream of a neighbourhood and God’s intention for a society grounded in the common goo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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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일곱번째 주일 / 10월 세번째 주일

창조절, 주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시편 119:105 - 117

정해빈 목사




1. 창세기 1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 창조 이야기가 제일 처음 나오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127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동등하게 지으셨습니다. 또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진흙과 하나님의 숨이 합쳐져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었다는 말씀과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능력이 우리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양심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말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동물에게는 양심이나 도덕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그냥 본능대로 행동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양심이 있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해야 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내가 남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남에게 해를 입히려고 하다가도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그것을 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양심에 전혀 가책을 받지 않고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형상//양심이 죽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자비로운 마음, 너그러운 마음, 사랑의 마음이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본능을 따라 살지 않고 양심에 따라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살지 않도록 하나님의 형상//양심을 우리 마음 안에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양심이 살아 있어서 양심대로 바르게 사는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 중에는 양심이 죽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예를 들면 트럼프 라든지,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가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여성을 상대로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악을 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주신 형상//양심대로 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법을 만드셨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산다면 법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양심대로 살지 않으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주는 법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원래 법은 양심을 보완해주고 사람들이 양심대로 살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양심을 따라가는 법이 좋은 법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보면 법이 양심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위배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집권을 한 후에 유대인/집시 같은 사람들을 격리 수용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게르만 민족이 제일 똑똑하니까 우리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하고 유대인이나 집시들은 국가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해가 되니까 따로 격리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만든 법에 찬성했습니다. 히틀러는 불법으로 유대인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가만히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이 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양심에 따라 이 법에 반대했을 뿐 대다수 국민들은 히틀러의 선동에 속아서 히틀러가 만든 법에 찬성했습니다. 과거 인류 역사를 보면 여성을 차별하는 법도 있었고 노예를 인정하는 법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그 법을 만드는 것을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법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아니 그 당시에도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 법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양심과 일치해야 합니다. 양심에 가까운 법이 좋은 법이고 양심에 먼 법이 나쁜 법입니다. 가만히 귀를 귀울여 보면 내 마음 안에서 조용하게 말하는 양심의 목소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2.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형상//양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형상//양심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말씀에 기초해서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모든 종교가 말씀과 양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종교들 중에는 도덕과 윤리가 없는 종교들도 많았습니다. 옛날 고대 종교들은 대부분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도덕이나 윤리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신을 노엽게 하지 않고 기쁘게 해야만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양심을 따라 사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미가서 66절 말씀,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살진 고기와 기름을 바쳐야 합니까? 내 몸을 바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고기와 기름으로 제사를 많이 드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을 실천하고 자비롭게 살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있다고 미가서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 형상을 따라 양심에 맞게, 정의롭고 자비롭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형상//양심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런데 이 십계명 말씀을 자세히 보면 무엇을 하여라, 무엇을 하지 말아라, 이렇게 간단하게 끝이 납니다. 왜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을 하면 안 되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이것을 하면 복을 받고 저것을 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 이런 말씀도 없습니다. 십계명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것은 그것이 양심에 비추어 보았을 때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 계명들, 예를 들면 함무라비 법전 같은 것을 보면 이것을 행하면 복을 받고 이것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설명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법을 지킵니다. 마치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어린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왜 안 돼지요이렇게 물었을 때, 어떤 아이가 거짓말하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하면 안되요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는 거짓말 하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벌 받지 않으려면 이 법을 지켜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것이 우리 양심에 옳기 때문에 이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심이 법이고 법이 양심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양심대로 정직하게 산다면 이 세상에는 법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벌 받지 않기 위해서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숨/양심대로 살기 위해서 십계명을 지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을 힘들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우리들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들이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살지 말고, 말씀을 따라, 양심을 따라 수준 높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벌 받지 않기 위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려고 나는 맹세하고 또 다짐합니다. 주님, 내가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기도를 즐거이 받아 주시고 주님의 규례를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생명은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만, 내가 주님의 법을 잊지는 않습니다.” 진실로 주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우리가 어둠에 빠지지 않도록,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살지 않도록,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길을 비추어 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등불 삼아서 하나님의 형상 답게, 양심에 맞게,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reation, your word is a lamp

Psalms 119:105 117


Your word is a lamp that gives light wherever I walk. Your laws are fair, and I have given my word to respect them all. I am in terrible pain! Save me, LORD, as you said you would. Accept my offerings of praise and teach me your laws. I never forget your teachings, although my life is always in danger. Some merciless people are trying to trap me, but I never turn my back on your teachings. They will always be my most prized possession and my source of joy. (Psalms 119:105-111)


I have made up my mind to obey your laws forever, no matter what. I hate anyone whose loyalty is divided, but I love your Law. You are my place of safety and my shield. Your word is my only hope. All of you worthless people, get away from me! I am determined to obey the commands of my God. Be true to your word, LORD. Keep me alive and strong; don't let me be ashamed because of my hope. Keep me safe and secure, so that I will always respect your laws. (Psalms 119:112-117)


As Christians, we believe that God created humankind in the image of God, male and female at the same time. We also believe that God formed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ccording to the scriptures, we, human beings, were made through the image of God and the breath of God. The image of God and the breath of God may indicate conscience in our mind. God put the inner voice in our heart so that we know instinctively what we should do and not. But while some people live according to our conscience, others do not. So we believe that God gave us the word in order to enlighten and strengthen our conscience. Truly, the word of God is a lamp that gives light wherever we walk. The laws of God are fair and we are called to respect and follow them all. We confess that your word is my only hop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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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여섯번째 주일 / 10월 두번째 주일

추수감사절, 신앙은 감사와 존경입니다

시편 136:1 - 9

정해빈 목사




김현승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감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 받았기에 누렸기에 배불렀기에 감사하지 않는다... 허물어진 마을에서 불 없는 방에서 빵 없는 아침에도 가난한 과부들은 남은 것을 모아 드리었다. 드리려고 드렸더니 드리기 위하여 드렸더니 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 마음만을 받으시고 그 마음과 마음을 담은 그릇들은 더 많은 금은(金銀)의 그릇들을 보태어 우리에게 돌려보내신다. 그러한 빈 그릇들은 하늘의 곳집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주인(主人)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이다, 시인은 감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진실로 감사는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넉넉하고 풍성하게 지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따뜻한 햇빛, 맑은 공기, 풍성한 열매와 곡식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하루하루 살 수가 있습니다. 종교는 감사와 존경이다,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종교는 존경이다, 우리 한글말도 말이 비슷한데, 영어도 말이 비슷합니다. Religion is reverence. 종교생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감사하고 존경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일반 사람들도 감사하고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더 적극적으로 더 분명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감사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서양 속담에 전쟁터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는 누구나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 자녀들이 왜 교회에 가야 되냐고, 왜 추수감사예배를 드려야 하냐고 묻는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존경하고 감사를 고백하기 위해 교회에 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것을 당연히 여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길을 걷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것들입니다.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지혜로 하늘을 만드신 분께 감사하여라. 물 위에 땅을 펴 놓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큰 빛들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신앙은 감사와 존경입니다. 종교와 존경은 같은 말입니다. 존경이 발전해서 종교가 되었습니다. 감사는 마중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고 더 큰 감사를 내려주십니다.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감사의 마음을 담은 그릇을 받으시고 그 그릇 위에 많은 것을 채워서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 지금 농부들이 기쁨으로 거두는 땀의 단들보다도, 지금 파도를 헤치고 돌아온 저녁 항구의 배들보다도, 지금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주택가의 포근한 불빛보다도, 더욱 풍성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것들을 모두 잃는 날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고난 중에도 감사를 드릴 때 감사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줍니다. 감사는 우리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고 더 큰 감사를 불러일으킵니다. 진실로 신앙은 감사와 존경입니다. 감사와 존경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합니다. 진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감사와 존경을 고백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By singing, praying, confessing, and sharing, we express our gratitude to God today. Many people take for granted everything they can do, eating, walking, seeing, listening, and speaking. But these things do not come from our achievements. Rather these things come from God who loves us and gives us as free gifts. One famous theologian said, “religion is thanksgiving, reverence, and respect.” He said, the term “religion” came from “reverence.” Religion begins with a sense of reverence, the recognition of God’s greatness and our limitations. That is why 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 and few atheists in hospitals. 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 because times like those bring us face to face with our limitations. We who are usually so self-confident, so secure in our ability to control things, suddenly learn that the things that matter most in our lives are beyond our control. Having religion and believing God means to honour God and to show reverence and respect to God. Truly religion is reverence. As christians, we honor God for God’s wonderful deeds. We pay respect to God as our Creator. If our children ask, why do we go to church?, why do we give thanks to God? I think we can say, we go to church to express our respect and reverence to the Creator, our God.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e is good, for his steadfast love endures for ever. Give thanks to the Lord who alone does great wonders, who by understanding made the heavens, who spread out the earth on the waters, for his steadfast love endures for ever.”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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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다섯번째 주일 / 10월 첫번째 주일

창조절, 거룩과 경이로움

시편 8:1 - 9

정해빈 목사





1. 창조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아 거룩과 경이로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 말에 경이롭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놀랄 경(), 다를 이(), 놀랍고 신기하고 평소와 다른 것을 보았을 때 경이(驚異)롭다는 말을 씁니다. 경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wonder가 됩니다. 어떤 것이 놀랍고 신기하고 평소와 다를 때 wonder, wonderful이라고 말하고 어떤 것이 놀랍지 않을 때는 no wonder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순간순간 경이로움을 체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꽃 한송이와 나무 한그루, 풍성하게 열린 열매를 보면서 창조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어떤 사람은 산과 바다와 호수, 밤하늘의 별과 높은 하늘을 보면서 창조의 경이로움을 체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선한 공기와 따뜻한 햇살을 보면서 창조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어떤 사람은 새로운 생명이 출산하는 순간 창조의 경이로움을 체험합니다. 캐나다에서는 한국과 같은 골목 시장이 없어서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농부들이 농산물을 파는 Farmer’s Market이 있습니다. 골목 시장에 가보면 가을을 맞아 풍성한 과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과//오렌지/호박, 모든 과일들이 아름답고 신기하고 예쁘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무덤덤하게 만들지 않으시고 놀랍고 신기하고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보면서 창조의 경이로움을 체험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사람이 만든 제품은 시간이 지나면 질리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만든 제품들, , 자동차, 핸드폰, 컴퓨터는 처음에는 예쁘고 신기하고 경이롭게 보입니다. 디자인이 이쁘구나, 이런 기능이 있구나, 참 편리하다 감탄을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물건이 더 이상 신기하거나 경이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물건이 여전히 쓸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지겹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옷을 사 입고 새로운 물건을 구입합니다. 신기하게도 사람이 만든 제품은 금방 질리고 지겹게 느껴집니다. 쉽게 유행을 타기도 하고 쉽게 구식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질리지 않습니다. 사람들 중에 산이 너무 지겹다, 호수가 너무 지겹다, 나무가 너무 지겹다, 잔디밭이 너무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답고 신기하고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자연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연을 만드시고 자연 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제품은 쉽게 지겨워지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지겹지 않고 계속 경이롭게 보입니다. 


하지만 인류가 발전하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생명의 신비, 자연의 신비를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창조의 경이로움 보다는 인간의 능력을 더 강조합니다. 자연을 보면서 감탄하고 놀라기 보다는 빨리 정복하고 개발하려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아름다운 산을 보면서 저 산이 참 신비롭고 예쁘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저 산을 빨리 개발하고 정복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을 보면서 신비롭고 두려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저 산 속에 하나님의 기운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에는 산에는 산신령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생각하면 유치하게 보이지만 자연을 경외하고 신비롭게 생각하는 옛날 사람들의 자세가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예전에 나이드신 사마리아 회원들하고 히말라야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에 올라갔다가 죽은 동료를 찾기 위해 산을 등정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 히말라야 산에 올라갔다가 조난당해서 얼어 죽은 사람들이 지금도 곳곳에 그대로 있는 것이 보입니다. 너무 높아서 시신을 가지고 내려 올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산이 있으면 무작정 산을 정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올라가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저 높은 산을 두렵고 신기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좋을 텐데,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사람들은 높은 산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너무 많이 등산을 하니 산이 망가지고 사람이 죽고 쓰레기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2.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시대를 가리켜서 거룩을 잃어버린 세대, 경이로움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룩과 경이로움을 잃어버린 세대는 불행합니다. 놀랄 것도 없고 신비로운 것도 없고 감사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지식과 과학으로 설명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딱딱하고 메마른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자연 과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자연 과학 앞에서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우주를 연구하는 사람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우주 앞에서 경이로움을 체험합니다. 거룩과 경이로움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딱딱하고 메마른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신앙이 언제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느냐 질문한다면, 인생을 살면서 어느 날 갑자기 거룩과 경이로움을 체험하는 순간, 신앙생활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신비롭고 경이로운 것을 만났을 때 사람은 영적인 체험을 하고 종교적인 인간이 됩니다. 영적인 존재 앞에서 감사하고 감탄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이 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ph Otto)1917년에 쓴 [성스러움의 의미, The Idea of the Holy]라는 책에서 사람은 거룩한 존재를 만날 때 두려움과 신비로움을 체험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크고 위대한 거룩의 체험을 할 때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자연을 통해서 거룩을 만날 수도 있고 신앙 체험을 통해서 거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거룩을 체험했다는 측변에서 볼 때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거룩한 존재가 너무 크고 위대하기에 나라는 존재가 너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이러한 거룩과 경이로움의 체험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의미있게 하고 기쁘고 감사하게 만들어 줍니다.


최근에 토론토 동쪽 스카보로 West Hill United Church, 그레타 바스퍼(Gretta Vosper) 목사 이야기가 신문 방송에 여러 번 나왔습니다. 나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대신 생명, 정의, 평화, 희망, 사랑을 믿는다 이런 비슷한 주장을 했습니다. 토론토 연회에서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목회자로는 부적절하니 목사직을 박탈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총회에다가 최종 결정을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바스퍼 목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목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많이 찾아왔고 교회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목사가 목회를 못하게 하느냐 이렇게 말을 하고, 토론토 연회 결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목사 한 사람 때문에 교단이 오해를 받으니까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을 합니다. 바스퍼 목사의 주장 중에 들어볼만한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얼굴에 수염이 난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하늘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벌을 주려고 천둥/번개를 보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스퍼 목사의 주장 중에 옳은 부분이 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시작하니까, 자신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않으니까 주기도문을 고백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주기도문을 없애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주기도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 속에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분이 너무 경솔하구나,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상징적이고 영적입니다. 상징을 다 빼버리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여러분 이 중에서 어느 말이 귀에 잘 들어오고 은혜가 되십니까? “사랑이 하나님이다이 말보다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이 말이 더 귀에 잘 들어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친밀하고 따뜻하게 고백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8편 말씀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과학의 눈으로 보면 사람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오 하나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십니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감사하는 것이고 놀라는 것이고 경이로움을 고백하는 것이고 거룩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거룩함, 경이로움, 감사함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항상 감사하고 항상 감탄하고 항상 주님의 거룩함을 찬양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Creation, holy and wonder

Psalms 8:1 – 9


O Lord, our Sovereign, how majestic is your name in all the earth! You have set your glory above the heavens. Out of the mouths of babes and infants you have founded a bulwark because of your foes, to silence the enemy and the avenger. When I look at your heavens, the work of your fingers, the moon and the stars that you have established; what are human beings that you are mindful of them, mortals that you care for them? (Psalms 8:1 - 4)


Yet you have made them a little lower than God, and crowned them with glory and honour. You have given them dominion over the works of your hands; you have put all things under their feet, all sheep and oxen,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 the birds of the air, and the fish of the sea, whatever passes along the paths of the seas. O Lord, our Sovereign, how majestic is your name in all the earth! (Psalms 8:5 9)


In 1917, the German theologian Rudolph Otto said in his book, [The Idea of the Holly], that there is an overwhelming, almost frightening aspect to encountering the Holy. To meet it is to meet a reality so much greater than ourselves that we feel small in comparison, not because we are in fact small but because the Holy is great on a scale we have never known before. We feel that we are important enough to be invited to encounter the Holy but in its presence we are overwhelmed and made aware of our own smallness. This insight shows us the fact that the journey of faith begins with realizing the reality of awe and wonder. Religion is reverence! As christians, we do not think that the world is made of just basic materials and by scientific rules. Rather we believe God created the world with beauty, mystery, and wonder. So we confess as the Psalmist say, “what are human beings that you are mindful of them, mortals that you care for them?”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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