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여섯번째 주일 / 2월 두번째 주일

창립50주년,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

히브리서 11:1 - 10

정해빈 목사




이상철 목사님께서 쓰신 자서전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 출판 기념회가 2011년 우리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이 목사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어떤 분이 이 목사님을 생각하면서 장례식 내내 마음이 슬펐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캐나다 사회의 지도자 일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선구자로서 인생을 훌륭하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의 개인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본래 이 목사님 가정은 함경북도 명천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1910년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우고 땅을 빼앗는 바람에 이 목사님 할아버지께서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크 다보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없었더라면 이 목사님 할아버지가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7살 때까지 살다가 소련 공산군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공동수용소에서 키운다는 소문을 듣고 중국 북간도 용정으로 피신해서 거기서 부모는 소작농을 하고 이상철은 초등학교와 은진중학교와 중앙사범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일제에 징집되기 직전에 해방을 맞아서 징집을 피할 수 있게 되었고 교사 생활을 하던 중에 중국 공산당이 기독교를 핍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 인생은 힘센 나라들에 의해서 짓밟힌 지난 100년간의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를 잘 보여줍니다. 일제를 피해서 러시아로 갔다가, 소련을 피해서 중국으로 갔다가, 중국 공산당을 피해서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서진 책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가 우리에게 주는 세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나그네 인생을 산 사람은 자기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자기처럼 고난받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나그네는 나그네인데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가 됩니다. 자신이 고난받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고난받는 이웃을 보면 내 일처럼 아파하고 그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나라도 없고 집도 없이 떠돌아다녀 본 사람은 떠돌이/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압니다. 이 목사님은 어린 시절 그런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한평생 나그네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이번 장례식 때 캐나다연합교회 조단 캔트 총회장께서 이번 장례식에 이런 내용의 조사를 보내주셨습니다. Jordan Cantwell, Moderator of the United Church of Canada sent us this letter, “Dear Korean United Church leaders and members, Rev. Lee was deeply revered in The United Church of Canada. As Moderator from 1988 to 1990, he lifted up the voices of the isolated and oppressed, tackling issues relating to the ordination of homosexual persons, racial equality, indigenous, and other human rights issues. Although I never had the chance to meet Rev. Lee, I admire him for providing leadership in a time of great discord in our church. As a committed and compassionate pastor, he worked tirelessly to build bridges between The United Church and other immigrant communities in Canada. The United Church of Canada’s “intercultural vision” owes much to him."


이 목사님께서 총회장 하실 때인 1988-1990년에 캐나다는 크게 3가지 논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들과 백인들과의 관계 문제였고, 둘째는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 문제였고, 셋째는 백인들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문제였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총회장을 하시면서 이 3가지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셨고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셨습니다. 아시아 사람이 최초로 총회장이 됨으로서 백인들이 아시아 사람들을 존중하는 계기를 마련하셨고, 성적 소수자들이 교회 내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 지도자들을 찾아가 캐나다연합교회를 대표해서 사과하셨습니다. 캐나다 역사를 보면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점이 하나도 없는데 다만 한 가지 과거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 자녀들을 기독교가 운영하는 기숙사에 강제로 보내서 자녀들을 가르치게 한 것이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백인 지도자가 원주민들을 찾아가도 원주민들이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들과 비슷하게 생긴 수염 난 사람이 자신들을 찾아와서 캐나다연합교회를 대표해서 사과를 하니까 원주민들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원주민 문제를 다 해결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목사님께서 원주민 문제에 상당한 공헌을 하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목사님께서 인종문제, 소수자 문제, 원주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어린 시절 고난 받으며 살았던 나그네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 마음을 여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나그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열린 마음을 갖고 다른 이웃에게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나그네는 겸손하고 검소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나그네는 무거운 짐을 들고 여행을 떠나지 않습니다. 짐을 단순하고 가볍게 해야 인생이라는 먼 여행을 쉽게 떠날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나그네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그네는 이 세상의 물질과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응답해야 하고 있으라면 있어야 하고 가라면 가야하기에 나그네는 무엇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무엇에 묶여 있어서도 안 됩니다. 나그네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인생을 따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그네는 순례자가 되기도 하고 선구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기 때문에 순례자이고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기 때문에 선구자입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한평생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시면 그곳으로 가셨고 이곳으로 가라고 하시면 이곳으로 가셨습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셋째로 나그네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있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게 여겨집니다. 인생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 기쁘고 감사해야만 힘든 인생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영적인 나그네는 고난 중에서도 감사하고 작은 것에도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참된 나그네요 순례자요 선구자입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겪으시면서도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인생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고백하셨고 어렵고 힘든 일들을 수행하시면서도 항상 웃음과 유머가 넘치셨습니다. 어느 교인이 왜 수염을 기르냐고 질문하니까 목사님께서 교인들이 평소에는 양 같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늑대처럼 달려들 때가 있는데 그 때를 대비해서 사자처럼 보이기 위해서 수염을 길렀다고 농담하셨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고난 중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참된 나그네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에는 저 유명한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물을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노아와 아브라함 모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의 선배들과 이상철 목사님을 따라서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가 되어 이웃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겸손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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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다섯번째 주일 / 2월 첫번째 주일

창립50주년, 이 땅에 뿌리를 내리며

창세기 50:22 - 26

정해빈 목사



지난 일주일 동안 이상철 목사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장례식이 있었는데 장례식장과 주차장과 예배당과 주방에서 봉사해 주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화요일 조문, 수요일 장례예배, 목요일 하관예배, 3일 동안 약 천명에 해당하는 분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또한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조가를 불러주신 성가대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입관예배/발인예배를 하나로 합쳐서 예배를 드리다보니 예배시간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다음 주일에 사모님과 가족들이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 이상철 목사님을 추모하는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989년에 나온 이상철 목사 은퇴 기념 설교집, [하나님이 인류의 희망] 머리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수많은 교우들의 장례식을 집례하고 그들의 유해를 묘지에 묻는 마음 아픈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의 유해가 누워있는 묘지에 우리 두 사람이 묻히게 될 것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하고 너무도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장례식 설교에서 이민자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낯설은 땅에다가 묻는 아픈 경험을 통해 뿌리를 내린다는 말을 종종 한 일이 있습니다. 나같이 평생을 방랑객으로 살아 온 사람이 죽어서 묻힐 만한 땅을 찾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고 하물며 한국 이민자들이 이 땅에 내리는 뿌리의 한 가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글을 읽으면서 이 목사님께서 참으로 생각이 깊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민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낯선 땅에 묻는 아픈 경험을 통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기 전까지 이 땅은 낯선 땅, 외국 땅, 이민자로 사는 땅이 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부모, 아내와 남편, 자녀가 죽어서 이 땅에 묻히게 되면 이 땅은 비로소 내가 살아야 하고 내 후손들이 살아야 하는 땅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는 그 아픈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이 땅의 주인으로서 비로소 정착하게 됩니다.


이 목사님은 언젠가 한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백인들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를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나가면 주류사회가 분명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어차피 외국에 와서 사는 이상 주류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백인들은 심술궂은 데가 있어요. 적극적으로 도전을 하면 받아들이고 소수민족 저희들끼리 놀면 불러들이지 않고 가만 놔둡니다. 그러므로 실수를 하더라도 자꾸 도전하면 함부로 못하지요. 젊은이들은 용기를 가지고 눈을 넓게 보고 당당하게 나가야 됩니다. 일을 하다보면 일부 차별을 당하는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갖고 열심히 해 주인이 되고 지도자가 되면 오히려 잘 따라줍니다.” 우리가 소수 민족이라고 해서 위축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 사회에 진출해서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주류 사회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진출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이곳이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아야 하는 땅이기에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시베리아를 거쳐서 중국을 거쳐서 한국을 거쳐서 벤쿠버를 거쳐서 토론토에 정착하셨고 저희들의 선구자가 되셔서 이 땅을 이민자/나그네들이 존중받는 땅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목사님을 따라서 지난 50년 동안 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67년 토론토 최초의 한인 교회로 세워진 이후 그냥 이방인으로 살지 않고 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한인 사회를 위해서 일했을 뿐만 아니라 캐나다 사회를 위해서도 일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한인교단에 가입하지 않고 캐나다연합교회에 가입해서 이곳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며 지냈습니다. 해외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감당해야 할 2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한인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인교회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한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김치 먹고 한국말 쓰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뿌리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며칠 전 중국 Community가 주최하는 설날 파티에 가 본 적이 있었는데 수 백명이 모여서 전통 옷을 입고 전통 놀이를 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당 정치인들을 초청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명절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문화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스러워할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들은 우리의 것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끼리만 모여서 살면 안 되고 이곳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현지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외부와 단절된 채 우리끼리만 모여서 살면 우리들은 스스로 게토가 되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주변인/변방인 으로 남게 됩니다. 당당하게 주류 사회로 진출해서 이 땅을 더 조화롭고 평화롭게, 서로 존중하고 서로 배우는 사회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캐나다연합교회는 Intercultural Church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Intercultural 이란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상호 문화, 교류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Multicultural 이란 말을 많이 썼는데 이 말은 서로 다른 문화들이 교류 없이 그냥 공존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요즘은 Multicultural 이란 말 대신에 서로 다른 문화들이 그냥 공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류하고 서로 배워야 한다는 뜻에서 Intercultural 이란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거 캐나다 교회는 대부분이 백인 교회였는데 백인 교인이 줄어들면서 백인 교회로 계속 남아 있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만드시고 모든 인류를 똑같이 사랑하시는데 백인들만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백인 문화가 캐나다 교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들이 함께 공존하고 함께 배우는 교회, 그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사회에 더 깊이 뿌리를 내려서 캐나다연합교회가 Intercultural Church가 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들은 요셉괴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요셉은 가나안 땅에서 살다가 형들에 의해 이집트 노예로 팔려갔지만 성실한 자세로 일한 끝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마지막 죽기 전에 가족들에게 나중에 후손들이 이집트를 떠나 조상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나의 뼈를 꼭 가지고 가야 한다고 유언을 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조상들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지만 이집트가 히브리 백성들이 살만한 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을 모르는 바로 왕이 히브리 백성들을 억압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나그네들을 환영하는 나라가 아니라 억압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집트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조상들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정부 보조를 받는 영주권자들 다 떠나라고 명령을 했는데 연방대법원이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고 합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이민자들을 불안하게 하면, 이민자들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들은 우리가 죽었을 때 굳이 조상들의 땅에 우리 몸을 매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매장되어야 우리들의 후손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이 땅의 주인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려서, 이 땅을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 서로 존중하고 서로 배우는 나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로 만드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50th anniversary, rooting in this land

Genesis 50:22 - 26


Joseph lived in Egypt with his brothers until he died at the age of one hundred ten. Joseph lived long enough to see Ephraim's children and grandchildren. He also lived to see the children of Manasseh's son Machir, and he welcomed them into his family. Before Joseph died, he told his brothers, "I won't live much longer. But God will take care of you and lead you out of Egypt to the land he promised Abraham, Isaac, and Jacob. Now promise me that you will take my body with you when God leads you to that land." So Joseph died in Egypt at the age of one hundred ten; his body was embalmed and put in a coffin. (Genesis 50:22-26)


According to Genesis, although Joseph became the governor of all Egypt, he did not want to be buried in Egypt. For him, that country was not the land where his people, which was called wanderers or Hebrews, can take root deeply with aboriginal people. He knew that the Egyptians would not welcome his descendants later. So before died, Joseph told his brothers to take his body with them when God leads them to the land of promise. However, In contrast to Joseph, we think that we should take root in the land where we live now. The Very Rev. Dr. Sang Chul Lee once said, “Immigrants take root through their painful experiences of burying their loved ones to strange lands." We are called to make this country our land where all people live with love and respect. We are called not to live as immigrants but messengers of the land. We can live together with other people and change the world by taking root deeply in this lan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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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네번째 주일 / 1월 다섯번째 주일

주현절, 사회적 결핍을 치료하시다

마태복음 4:23-25, 8:14-17

정해빈 목사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부족할 때 우리는 보통 결핍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양이 결핍되었다, 정신이 결핍되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사람은 신체적인 조건과 사회적인 조건과 영적인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체적인 결핍이 일어나면 사람은 건강해질 수가 없고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결핍과 영적인 결핍이 일어나면 사람은 건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신체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의식주,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잘 수 있는 집이 있어야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식사에 포함된 수분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1리터의 물을 마셔야 하고 5대 영양소,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비타민, 무기질을 섭취해야 합니다. 위생 관리도 잘 해야 하고 신선한 공기도 마셔야 하고 햇빛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신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활동하셨던 갈릴리에서는 신체적인 결핍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위생 관념이 부족해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고 음식이 부족해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본래 갈릴리는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었고 갈릴리 호수가 있어서 농수산물이 많았습니다. 가만히 나두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로마와 헤롯과 성전이 부과한 세금 때문에 빈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가 세금을 거두고 그 다음에 갈릴리를 지배한 헤롯이 세금을 거두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세금을 거두어 가니 갈릴리 사람들은 이리저리 다 빼앗기고 신체적인 결핍, 빈곤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충분히 먹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면 사람은 영양이 부족하고 면역이 약해져서 쉽게 질병에 걸리게 되고 쉽게 죽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30세였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 산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어렸을 때 일찍 죽은 사람도 있기 전체적으로 따지면 평균 수명이 30세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옛날 기준으로 하면 내 나이에서 20년을 줄여야 합니다. 지금 50세 되신 분들은 옛날로 따지면 30세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70세 되신 분들은 내 나이가 50세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지금 80세 되신 분들은 내 나이가 60세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60세에 회갑잔치를 했는데 오늘날에는 80세에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옛날에는 신체적인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양 결핍, 위생 결핍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체적인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의사들이 마을과 가정을 방문해서 치료하는 것을 왕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의사들이 왕진하듯이, 마을과 가정을 방문해서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음식이 필요한 이에게는 음식을 주시고 치료가 필요한 이에게는 치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님이 환자의 가정을 방문해서 치료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둘째로 사람은 사회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사회가 평화롭고 안전해야 사람이 불안을 겪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사회가 평화롭고 안전해야 사람이 외출도 할 수 있고 친구도 만날 수 있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 사회가 평화롭고 안전하니까 우리들이 자유롭게 외출도 할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고 사람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사는 사회가 인종차별이 심하고 위험하고 불안하다면 우리들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땅을 살 것입니다. 사회가 불안하거나 위험하면 사람들의 정신도 불안해져서 육체의 질병이나 정신적인 질병을 앓게 됩니다. 지진, 화재, 전쟁, 학살, 인종차별이 일어나서 학대를 당하고 자녀나 부모를 잃어버렸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사람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을 앓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복음서에는 왜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올까요? 옛날 사람들은 정신적인 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귀신들렸다고 표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들렸다는 말은 그 당시 사회가 심각하게 불안하고 억압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군대가 갈릴리에 쳐들어와서 로마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그런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미치거나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세상이 억압적이면 억압적일수록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를 더 사랑하고 서로를 더 지켜주고 서로를 더 품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악에 저항하고 사랑의 힘으로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열 사람이 그 사람을 지켜주고, 한 마을이 아프면 열 개의 마을이 그 마을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우리들의 사랑은 더 튼튼하고 깊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사람은 영적인 결핍이 일어나면 안 되고 영적인 보호와 사랑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은혜와 사랑이 있어야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 내가 귀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나에게 자존감과 자신감을 줍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왜곡되어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면 사람은 영적인 결핍을 느껴서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죄책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복잡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내가 가난한 것도 벌 받았기 때문이고, 내가 불행하게 된 것도 벌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인 결핍, 사회적인 결핍, 영적인 결핍 속에서 살았습니다. 한 가지 결핍만 와도 제대로 살기가 힘든데 3가지 결핍이 한꺼번에 오니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몸은 잘 먹지 못해서 아프고,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은 폭력적이고, 거기에 더해서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하니 사람이 제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영적인 결핍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인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사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526절이 말하는 것처럼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를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충만에서 결핍으로 흐릅니다. 장마철에 비가 오면 물이 웅덩이에 고이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결핍이 있는 곳으로 흘러서 그 결핍을 채워줍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주의 은혜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결핍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으켜주시고 그들의 결핍을 채워 주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결핍을 느끼시는 분들은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가 신체적인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내 몸을 고쳐 주옵소서. 주님, 내가 사회적인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내 삶을 고쳐주옵소서. 주님, 내가 영적인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지치지 않도록 나를 찾아오셔서 내 영혼을 채워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 되시는 주님의 능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와서 우리의 결핍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가 오늘날 신체적인 결핍, 사회적인 결핍,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핍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을 돕고 치유하는 복된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Jesus healed social deficiency

Matthew 4:2325, 8:14-17


Jesus went all over Galilee, teaching in the Jewish meeting places and preaching the good news about God's kingdom. He also healed every kind of disease and sickness. News about him spread all over Syria, and people with every kind of sickness or disease were brought to him. Some of them had a lot of demons in them, others were thought to be crazy, and still others could not walk. But Jesus healed them all. Large crowds followed Jesus from Galilee and the region around the ten cities known as Decapolis. They also came from Jerusalem, Judea, and from across the Jordan River. (Matthew 4:23-25)


Jesus went to the home of Peter, where he found that Peter's mother-in-law was sick in bed with fever. He took her by the hand, and the fever left her. Then she got up and served Jesus a meal. That evening many people with demons in them were brought to Jesus. And with only a word he forced out the evil spirits and healed everyone who was sick. So God's promise came true, just as the prophet Isaiah had said, "He healed our diseases and made us well." (Matthew 8:14-17)


Today’s gospel shows that many people in Rome’s empire experienced varying degrees of poverty. Understandings of hygiene were limited; social stresses were high; water quality poor, food insecurity was rife with low quality and limited quantities. Such factors resulted in widespread diseases associated with poor nutrition and a lack of immunity. These kinds of diseases were death-bringing in a world that required physical labor for survival. Jesus’ healings are acts that repair imperial damage and enact God’s life-giving empire in restoring people’s lives. They anticipate the completion of God’s working that creates a world in which all people enjoy abundant good food and physical wholeness, where the blind receive their sight,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poor have good news brought to them. Jesus healed physical, social, and spiritual deficiency. The healing power of Jesus flowed down from God to those in need. The spirit of God always runs down to fill up our wound and deficiency. We pray that God heals physical, social, and spiritual deficiency in the worl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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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세번째 주일 / 1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어부와 물고기

마태복음 4:12 - 23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4장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단계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 가셔서 3가지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는 헤롯이 세례요한을 처형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북쪽 갈릴리로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처형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를 전환점/Turning Point라고 합니다. 내가 사업을 해야 되겠다, 결혼을 해야 되겠다, 유학/이민을 가야 되겠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전환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세례요한의 죽음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죽음, 한 사람의 헌신적인 삶이 다른 사람에게 전환점을 주기도 합니다. 지난 월요일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추모하는 미국 국경일이었고 지난 금요일에는 오바마가 퇴임하고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참여했던 버스 샌더스 의원이 킹 목사님의 용기를 배워야 한다고 연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960년대 미국 지도자들이 킹 목사님을 지지하다가 킹 목사님이 미국의 베트남 참전에 반대하자 태도를 바꾸어서 미국에서 인종차별 운동만 하면 되지 왜 외교에 참견하느냐고 킹 목사님을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 목사님은 물러서지 않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킹 목사님의 자유, 평화, 비폭력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연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킹 목사님의 이런 활동이 8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요한의 죽음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살아있을 때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10년 이상 자신의 멘토/스승인 요한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고 깊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헤롯이 자신의 부정을 비판한 요한을 성에 붙잡았다가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죽음을 슬퍼하셨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깨끗한 사람이었고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그런 요한이 눈의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사역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요한이 한 사역을 계속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에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요한은 주로 요단강에서 말씀을 전했고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직접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자신이 자랐던 북쪽 갈릴리 지역으로 올라가서 그 곳에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갈릴리를 가리켜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가 차지한 지역이고 이방인의 땅이며 어둠의 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갈릴리가 이방인의 땅이라고 말한 것은 이방 사람들이 갈릴리를 지배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옛날에는 앗시리아 제국이 갈릴리를 지배했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 갈릴리를 지배했습니다. 갈릴리는 가장 북쪽 외딴 곳이었고 제국들이 통치하는 곳이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과 어부들이 로마 제국 치하에서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고통받는 바로 그곳,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곳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치료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이 큰 일을 하려면 큰 곳에 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외롭고 가난하고 힘든 곳으로 가셔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작고 보잘 곳 없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곳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큰 곳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가신 것처럼, 임현수 목사님도 북한에 들어가셨다가 현재 재판받고 수감 중에 계십니다. 북한전복음모행위를 했다고 하는데 백보 양보해서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연세가 많으신데 이제 그만 석방되기를 바랍니다. 북한 땅에 양로원, 탁아소, 고아원을 세우시고 동포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문제는 외교적으로 푸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캐나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임 목사님이 석방되도록 노력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각 나라들마다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로마는 창과 칼로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로마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선언하셨습니다. 로마의 방식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부들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지 않겠냐고 말씀하시고 당신을 따라온 그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고기 잡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향해서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부는 어부인데 물고기 잡는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우리에게 주는 몇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직업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을 향해서 어부 일 그만하고 이제부터 목수가 되어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부는 어부 인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직업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회사 그만두고 신학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나의 직업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직업이지만 목적이 달라지면 됩니다. 관점을 바꾸면 됩니다. 내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직업을 바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직업의 목적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입니다. 둘째,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은 물고기를 잡어 죽여서 먹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격려하고 후원하고 일으키는 사람, 그런 사람, 그런 멘토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하고,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 나와서 예수 믿게 하는 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더 나아가서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부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물고기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마태복음 419절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는 말씀입니다. make you fish, 여기 나오는 fish는 동사, 무엇을 낚는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fish를 명사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너희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고기로 만들겠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물고기도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물고기를 먹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먹어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나듯이 우리들도 자기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물고기를 신앙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ησος Χριστός, ΘεοΥός, Σωτήρ,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Jesus Christ, Son of God, Saviour). 예수의 첫글자 이오타.” 그리스도의 첫글자 ,” 하나님의 첫글자 테타,” 아들의 첫글자 웁실론구세주의 첫글자 시그마를 합치면 ΙΧΘΥΣ(익수스)가 되는데 익수스는 헬라어로 물고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로 서로 익수스(물고기)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기독교를 가리키는 두 가지 상징이 있다면 하나는 십자가이고 하나는 물고기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람을 살리는 어부가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나를 먹어라, 나를 내어주는 물고기 같은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

Matthew 4:12 23


When Jesus heard that John had been put in prison, he went to Galilee. But instead of staying in Nazareth, Jesus moved to Capernaum. This town was beside Lake Galilee in the territory of Zebulun and Naphtali. So God's promise came true, just as the prophet Isaiah had said, "Listen, lands of Zebulun and Naphtali, lands along the road to the sea and east of the Jordan! Listen Galilee, land of the Gentiles! Although your people live in darkness, they will see a bright light. Although they live in the shadow of death, a light will shine on them." Then Jesus started preaching, "Turn back to God! The kingdom of heaven will soon be here." (Matthew 4:12-18)


While Jesus was walking along the shore of Lake Galilee, he saw two brothers. One was Simon, also known as Peter, and the other was Andrew. They were fishermen, and they were casting their net into the lake. Jesus said to them, "Come with me! I will teach you how to bring in people instead of fish." Right then the two brothers dropped their nets and went with him. Jesus walked on until he saw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They were in a boat with their father, mending their nets. Jesus asked them to come with him too. Right away they left the boat and their father and went with Jesus. Jesus went all over Galilee, teaching in the Jewish meeting places and preaching the good news about God's kingdom. He also healed every kind of disease and sickness. (Matthew 4:19-23)


When John the baptizer was arrested and killed by King Herod, Jesus began his public ministry as one way of extending John’s ministry for the Kingdom of God. Jesus settled in Capernaum in the territory of Zebulun and Naphtali which was occupied by imperial powers. It positions Jesus as the light or saving presence that shines in the darkness of Rome’s imperial domination. Jesus asserts God’s light or saving rule in Roman Galilee. Jesus calls fishermen to a different loyalty and way of life, creates a new community, and gives them a new mission, fish for people. His summons exhibits God’s empire at work, this light shining in the darkness of Roman-ruled Galilee. Today’s message shows that we are called not only to be “spiritual fishers” for saving and healing people, but also “fishes” given to those in nee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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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두번째 주일 / 1월 세번째 주일

창립50주년, 생활 신앙

이사야서 42:1 - 7

정해빈 목사




한국 기독교 역사가 개신교는 130, 천주교는 200년이 되었는데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신학자를 꼽으라면 김재준과 박형룡, 이렇게 두 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진보적인 신학자로 알려져 있고 박형룡 목사님은 보수적인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형룡 목사님은 선교사님들이 전해 준 신학을 그대로 계승하고 경건하게 신앙생활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니까 예배만 드려야 하고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오락을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고 성경은 성경은 일점일획도 의심하지 말고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신학을 가리켜서 정통 보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김재준 목사님은 성경을 읽을 때 문자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믿고 구원받고 천당가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주의 기도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이 땅,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전파되어서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형룡 목사님의 강조점이 신앙생활에 있다면 김재준 목사님의 강조점은 생활신앙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열심히 읽고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김재준 목사님은 신앙생활도 잘해야 하지만 생활신앙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주일 예배 잘 드리고 기도 열심히 하고 말씀 열심히 읽어도 내 삶에서 나의 신앙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됩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1시간 열심히 예배를 드렸지만 나머지 23시간 동안에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산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은 잘 했을지 몰라도 생활신앙은 잘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하는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일 예배 1시간 뿐만 아니라 나머지 23시간에서, 내가 일터에서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가족과 보내는 모든 시간에서 나의 신앙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100번 읽고 40일 철야 기도를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100점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매일매일의 삶에서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고, 공의를 실천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형식적인 신앙, 열매없는 신앙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지 모르지만 생활신앙은 잘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걸어가면서도 기도하고 말씀을 줄줄 외웠습니다.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생활신앙을 잘 못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교만했으며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저 겉으로만 경건한 척 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라는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도 잘해야 하지만 더 나아가서 생활신앙도 잘 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 그런 생활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의 차이점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유교에서도 나타납니다. 유교 성리학이 조선 시대 500년을 이끌었는데 정통 성리학이 신앙생활을 강조했다면 조선 후기에 등장한 실학은 생활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성리학은 예로부터 명분과 형식과 이론과 예의범절을 중요시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이런저런 순서를 지켜야 하고 양반은 체통을 지켜야 합니다. 공자 왈 맹자 왈 학문을 해야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면 안 됩니다. 땀을 흘려서 농사를 짓거나 물건 만드는 사람은 양반이 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우스개 소리 아실 것입니다. 어느 날 서양 선교사들이 땀을 흘리면서 테니스를 치는 것을 고종 임금이 보았습니다. 고종 임금이 그것을 보면서 하인들 시키면 되지 무엇하러 땀을 흘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양반은 테니스를 쳐도 안 되고 땀을 흘려도 안 되고 물건을 만들어도 안 되고 음식을 만들어도 안 됩니다. 고상하게 앉아서 책을 보거나 아랫사람의 시중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조선 실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는 학문이 일반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유배 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500권의 책을 썼고 몸이 아픈 백성들을 위해서 [촌병혹치]라는 의학 서적을 펴냈습니다. 그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하는 중에 어부들을 위해서 바다 물고기를 연구한 [자산어보]라는 책을 냈습니다. 보수적인 양반들이 보기에는 양반이 점잖지 못하게 무슨 물고기 책을 쓰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약용과 정약전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을 쌓는데 백성들이 무거운 돌을 옮기는 것을 보고는 쉽게 옮길 수 있도록 기중기를 개발했고, 지방 탐관오리들이 부패한 것을 보면서 공직자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를 쓴 [목민심서]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남북한의 지도자들이 [목민심서]를 읽었더라면 남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베트남을 통일시킨 호치민은 책상에 목민심서를 놓고서 항상 읽었다고 합니다. 성리학자들이 명분과 형식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말한다면 실학자들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생활신앙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경재 교수님께서 쓰신 [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 책을 보면 놀랍게도 조선 실학자들의 실사구시, 생활신앙 전통이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함경북도 가장 북쪽 아오지 경흥에서 태어나셨는데 그곳에는 옛날부터 유배를 받은 실학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실학자들이 정부의 미움을 받는 일이 많았는데 미움을 받아서 유배를 가면 북쪽 끝 함경도로 가거나 아니면 남쪽 끝 전라도 강진으로 가거나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의 어머니가 그 지역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채향곡 선생의 4대 후손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도 김 목사님께서 평생 진보적이고 실천적이고 개방적인 신학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어린 시절부터 외가로부터 실학자들의 실사구시, 생활신앙 전통을 물려받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일제시대 함경도나 북간도에 이주를 한 조선 양반들은 정통 양반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농사를 지었고 학교와 교회를 세워서 후진을 양성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께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정권의 탄압을 피해서 캐나다로 망명 오셔서 10년 동안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셨습니다. 조선 시대 실학자들이 유배를 받은 것처럼 김 목사님께서도 유배 생활을 하시면서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창립50주년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들에게 훌륭한 신앙 전통을 물려주신 선배 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42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종,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메시야는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사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고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실까요? 하나님의 종은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겸손하고 조용하게 일합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진리로 공의를 선포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바로 이런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큰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됩니다. 겸손하고 조용하게 하루 24시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 합시다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말씀과 기도와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멈추지 말고,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교회, 꺼져가는 심지를 끝까지 지켜주는 교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50th anniversary, living faith

Isaiah 42:1 - 7


Here is my servant! I have made him strong. He is my chosen one; I am pleased with him. I have given him my Spirit, and he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 He won't shout or yell or call out in the streets. He won't break off a bent reed or put out a dying flame, but he will make sure that justice is done. He won't quit or give up until he brings justice everywhere on earth, and people in foreign nations long for his teaching. (Isaiah 42:1-4)


I am the LORD God. I created the heavens like an open tent above. I made the earth and everything that grows on it. I am the source of life for all who live on this earth, so listen to what I say. I chose you to bring justice, and I am here at your side. I selected and sent you to bring light and my promise of hope to the nations. You will give sight to the blind; you will set prisoners free from dark dungeons. My name is the LORD! I won't let idols or humans share my glory and praise. Everything has happened just as I said it would; now I will announce what will happen next. (Isaiah 42:5-7)


“Here is my servant. I have given him my Spirit, and he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 He won't shout or yell or call out in the streets. He won't break off a bent reed or put out a dying flame, but he will make sure that justice is done.” Today’s scripture shows that God has chosen people as God’s servants to bring justice to the world for the sake of God’s name. They won't give up until they brings justice everywhere on earth. That message reminds us of offering our bodies to God as a living sacrifice. We are called not to be Sunday Christians or to live a religious life, but to live faith with our whole heart and body in every day life. Let’s us remember that God wants us to spread the love and justice of God into every areas of the world. We are called to live faith.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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