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세번째 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사순절,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마태복음 20:20 – 28

정해빈 목사




사순절을 맞이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몇 주 동안 묵상하려고 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시면서 제자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길을 걸어가면서 제자들과 대화하시고 제자들의 생각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길을 걸어가면서 진리를 깨닫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도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을 만났고 사도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영적인 순례, 진리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진리를 어느 순간 한 번에 다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인생이라는 순례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과의 영적인 대화를 통해서, 예배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대화를 통해서 제자들의 생각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번 말해가지고는 제자들이 잘 이해를 못하니까 주님께서는 3번에 걸쳐서 십자가의 길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0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세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나의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부탁을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이 왕이 되시면 내 아들이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게 해 달라고 로비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대답하셨습니다. 주님과 제자들 모두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지만 주님이 생각하는 것과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고난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누가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을 차지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경쟁을 했습니다. 주님은 고난의 잔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은 고난, 섬김, 희생, 십자가, 선과 악, 빛과 어둠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권력, 명예, 영광, 높은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늘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과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과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간다고 해도 만약 주님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걸어간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같은 길을 걸어갔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고 주님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님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걸어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항상 누가 명예와 영광을 차지할 것이냐, 누가 2인자가 될 것이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얻고자 하는 욕구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일수록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더 강합니다. 서양에서는 직장에서 높은 분을 만나도 그냥 하이 하면 끝입니다. 토론토 시장도 출근해서 직원들에게 하이 인사하고 캐나다 수상도 친구처럼 인사합니다. 높은 사람이 왔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 숙여 인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양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직장에서 제일 높은 분이 출근하면 현관에 직원들이 나와서 거의 90도로 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복종하고 자기에게 머리 숙이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도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우월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런 맛에 출세를 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출세 지향적인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출세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합니다. 세상 살기가 더럽고 치사하니까 나도 어서 빨리 출세해서 다른 사람들을 부려먹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광야에서 힘과 권력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사탄이 이렇게 유혹했을 때 주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였다 말씀하심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힘과 권력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시고 섬김과 순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병을 고치셨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마다 주님께서는 그 자리를 피하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신이 났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면 나도 한자리 차지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제자들에게 내일 일찍 다른 마을로 가자, 나는 오늘도 내일도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하지 아니하셨고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몸과 마음을 치료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백성들을 억압하는 세상 통치자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죽였고 빌라도 로마 총독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먼저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인지도 모릅니다. 트럼프, 푸틴, 시진핑, 아베, 박근혜, 김정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이 새로 바뀌고 나니까 이민자들이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는 것처럼,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라가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고 평화로울 수도 있고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국가는 하루 24시간 오직 나라를 위해서 일하라는 뜻에서 통치자에게 수백 명의 비서들을 붙여주고 최고의 봉급을 주고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최고 수준의 대우를 해 줍니다. 그렇게 최고 수준으로 대우를 해줘도 통치자들은 대부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고 권력을 남용합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이 세상의 악한 통치자들을 본받지 말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경쟁하지 말고 나를 따라서 섬김과 순종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초대 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불렀던 그리스도 찬가,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가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맨 처음 교인들은 예배 시간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주님,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끝까지 순종과 섬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따라서 세상 통치자들을 본받지 말고, 힘을 숭배하고 과시하고 남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우리들,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be the servant of all others

Matthew 20:20 - 2


Then the mother of the sons of Zebedee came to him with her sons, and kneeling before him, she asked a favour of him. And he said to her, ‘What do you want?’ She said to him, ‘Declare that these two sons of mine will sit, one at your right hand and one at your left, in your kingdom.’ But Jesus answered, ‘You do not know what you are asking. Are you able to drink the cup that I am about to drink?’ They said to him, ‘We are able.’ He said to them, ‘You will indeed drink my cup, but to sit at my right hand and at my left, this is not mine to grant, but it is for those for whom it has been prepared by my Father.’ (Matthew 20:20 23)


When the ten heard it, they were angry with the two brothers. But Jesus called them to him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eir great ones are tyrants over them. It will not be so among you; but whoever wishes to b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ishe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your slave; just as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Matthew 20:24 28)


Today’s scripture shows that although disciples went along with Jesus, they thought about something different from Jesus. They argued about who would sit next to Jesus in Jerusalem, while Jesus talked about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It indicates that just walking with Jesus is not enough to be his disciples and all followers of Jesus must accept the way of serving others. Insteand of acknowledging Jesus’ anticipation of suffering and death, they imagined regal scene sitting in positions of honor and power at King Jesus’ right and left. So Jesus described how the dominion of God is different than the dominions of the world. He refers to those who are regarded as rulers in the pagan world of the Roman Empire. They “lord it over” their subjects. Their great ones exercise authority as tyrants, an authority that stands in contrast to the edifying and restorative authority displayed by Jesus. Once again Jesus emphasizes that he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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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두번째 주일 / 3월 두번째 주일

사순절, 교회는 빛과 소금입니다

마태복음 5:13 – 20

정해빈 목사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 6, 7장에서 제자들을 산으로 부르셔서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설교하신 산상설교/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반드시 읽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되는 말씀입니다. 산상설교에는 제자들을 축복하는 말씀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말씀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축복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들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9,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셔서 여러분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입니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자부심,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제자라는 자부심을 갖으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만 그에 맞는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내가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이 귀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직업윤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직업에 따라서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국가 공무원이나 학교 선생은 윤리에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약이나 도박을 해서도 안 되고 뇌물을 받아도 안 됩니다. 공무원은 나라를 운영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학교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런 윤리규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제자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대표적인 삶의 자세가 바로 소금과 빛입니다. 오늘 말씀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이 짓밟을 뿐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되어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소금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순간 이미 너희는 소금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보통 3가지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 부패를 막아주고 둘째로 음식을 오래 보존하고 셋째로 맛을 냅니다. 옛날에는 소금을 쳐서 음식을 오래 보존했고 소금으로 맛을 냈습니다. 우리가 소금이라는 말씀은 우리들이 진리를 보존하고 진리의 맛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소금의 첫번째 기능은 부패를 막는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므로 부패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부패할지라도 제자들은 부패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과 우리들이 모인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에 세상은 다 부패하고 썩었을지라도 교회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50년 동안 투명하고 깨끗한 교회가 되려고 노력을 해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우리 교회는 투명하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회를 열심히 하고 교회의 행정과 재정은 집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알아서 합니다. 목사가 교회 재정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고 단 1달러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더 깨끗하고 더 투명하고 진리를 보존하고 진리의 맛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가 소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한국에서는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파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헌법재판관들은 대체로 성향이 보수적인 분들인데 8명 전원 만장일치로 파면을 결정했습니다. 대통령이 공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자리를 이용해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했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국민들의 86%가 헌법재판소 결정에 찬성한다고 응답했고 12%가 반대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어느 대형 교회 목사가 교회버스 수십 대를 동원해서 교인들을 탄핵 반대하는 집회에 동원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기 의사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은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 가고 안 가고는 각자 의사에 맡겨야지 왜 교회가 버스를 대절해서 교인들을 실어 나릅니까? 국민들이 그런 뉴스를 보고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지 세상의 지탄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한국이 가장 민주주의가 살아 있습니다. 그 사회가 민주주의인지 아닌지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한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재벌 회장, 대통령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법을 어겼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외국 언론들이 한국은 민주주의가 살아있다고 보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어야 하고 진리이신 성령께서 역사해야 합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정직하고 깨끗해야 하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이 투명하고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협력해서 선을 이루어야 하고 절차에 따라서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풍성해야 하고 은혜가 넘쳐야 하고 용서와 치유가 일어나야 하고 차별이 없어야 하며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환영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부패할 지라도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어떤 면에서 보면 세상은 가면 갈수록 투명하고 민주적인데 교회는 반대로 폐쇄적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교회를 따라가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가 세상보다 뒤처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많이 바뀌었는데 여전히 이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3대 집단이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북한, 재벌총수, 대형교회, 이들 모두 다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고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독재 정권이 권력을 세습한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도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줍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범이 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존경하기 보다는 교회를 조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요 나의 제자이다, 나의 제자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에게 산상설교를 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마도 주님께서는 저쪽 산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이쪽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산에 있는 것은 높은 곳에서 사방에 빛을 비추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언덕 높은 곳에서 사방에 빛을 비추라고 성전을 지었는데 당시 성전은 부패하고 타락해서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비록 여러분이 성전과 비교해서 숫자도 적고 가진 것도 없지만 여러분이야 말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대형 교회도 아니고 재정이 넉넉한 교회도 아닙니다. 작고 초라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세상의 부패를 막고 세상을 비추는 교회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소금은 가만히 있어도 소금이고 빛은 가만히 있어도 빛입니다. 소금은 아무리 작아도 짠 맛이 나고 빛은 아무리 작아도 빛을 비춥니다. 주님의 제자는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 자체가 소금이요 빛입니다. 숨 쉬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소금과 빛을 드러낼 것입니다. 창립50주년을 맞이하면서 주님, 우리 교회가 작은 교회이지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church is salt and light

Matthew 5:13 - 20


You are like salt for everyone on earth. But if salt no longer tastes like salt, how can it make food salty? All it is good for is to be thrown out and walked on. You are like light for the whole world. A city built on top of a hill cannot be hidden, and no one would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clay pot. A lamp is placed on a lampstand, where it can give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Make your light shine, so that others will see the good that you do and will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Matthew 5:13 16)


Don't suppose that I came to do away with the Law and the Prophets. u) I did not come to do away with them, but to give them their full meaning. Heaven and earth may disappear. But I promise you that not even a period or comma will ever disappear from the Law. Everything written in it must happen. If you reject even the least important command in the Law and teach others to do the same, you will be the least important person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if you obey and teach others its commands, you will have an important place in the kingdom. You must obey God's commands better than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obey them. If you don't, I promise you that you will never get into the kingdom of heaven. (Matthew 5:17 20)


Jesus uses powerful images of salt and light as he describes what it means to live according to the ways of God’s realm. Jesus tells his followers that at this very moment they are salt cleansing, preserving, adding flavour. At this moment they are light revealing what is hidden, allowing all to see. God’s reign is not only a future promise; it also is present reality. We participate in that reign as we live in God’s ways. Our light should shine before others so that our works can direct others to give thanks and praise to God. Today’s scriptures indicate that the more corrupt and corrupted the world, the more we must be light and salt. We are called to be the church that lives as salt and stands on the hill as ligh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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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첫번째 주일 / 3월 첫번째 주일 / 3.1절 기념주일

청년주일내가 너를 좋아한다

마가복음 1:9 – 15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장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물을 머리 위에 떨어트리는 세례가 아니라 완전히 몸을 물속에 잠기는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올라오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년이 될 때까지 조용히 지내시다가 어느 날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시고 요한을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회개와 결단의 세례였고, 이제부터는 개인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로서 공적인 삶을 살겠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 장면을 보시고 너무 마음이 기쁘셔서 비둘기 같은 성령을 내려 보내 주시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땅에 있는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았고 하늘 아버지는 이 장면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와 땅의 자녀 사이에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하늘 아버지와 땅의 자녀가 서로 기뻐하였고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늘 아버지가 자녀를 보면서 기뻐하셨다는 장면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부모와 자식 관계로 표현을 합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히브리 백성들을 이집트 노예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율법을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 하늘 아버지를 실망시켰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 불평했고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는 실망의 관계, 애증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땅의 자녀들이 하늘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를 보시고 심히 슬퍼하시고 한탄하시고 때로는 분노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버릴 수도 없어서 심히 괴로워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땅의 백성들이 하늘 아버지를 실망시킨 이야기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구약 성경에는 내가 너를 좋아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하늘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부모 자식 사이에는 늘 이런 애증 관계가 있습니다. 부모의 눈으로 자식을 보면 자식은 무언가 부족하고 실망스럽고 못마땅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릅니다. 내 자식이 공부하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이나 이 정도는 해 주면 좋겠는데 자식이 그 기준에 못 미치면 부모는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딸, 또는 어머니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그런 애증관계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을 보면, 예를 들면 도스트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작품들을 보면 부모와 자녀,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애증의 관계로 묘사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못마땅해서 화를 내고 자식은 그런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때로는 아버지를 미워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땅을 보면서 항상 실망하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땅을 보면 하늘은 조용한데 땅은 늘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께서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결단하고 세례받는 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땅을 보면서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셨는데 비로소 예수님이 하늘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고백하고 세례받는 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땅의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를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큰일을 해서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세례받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 세례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셨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고 큰일을 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 기뻐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무 계획도 없고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때 그것을 제일 답답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늘 뜻을 찾고 그 하늘 뜻을 향해 열심히 살아갈 때 우리들을 보시며 기뻐하십니다. 98년 전에 있었던 3.1 운동도 평화와 자유를 주시는 하늘 뜻에 응답하는 우리 민족의 결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반대합니다. 침략과 폭력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부적인 인권을 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침략하지 마십시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이 자유와 평화와 독립을 위해서 일어서는 것을 보시며 심히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인생이 하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국의 43경 중의 하나인 중용(中庸) 첫 장을 보면 사람이 하늘 뜻을 깨닫는 3가지 단계, 3가지 과정을 잘 설명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태어날 때 하늘 뜻/사명을 받고 태어나는 데 중용은 이것을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하늘 뜻/사명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것이 성입니다. 성품/성격 이런 말들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하늘 뜻을 깨닫는 두번째 단계는 도()입니다. 하늘이 나에게 거룩한 사명을 주었는데 그 사명이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도를 닦아야 합니다. 하늘이 나에게 준 뜻이 무엇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늘 뜻을 깨닫는 과정을 도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이 하늘 뜻을 깨닫는 마지막 세번째 단계는 교()입니다. 하늘이 나에게 준 뜻을 깨달았으면 그 하늘 뜻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교육은 하늘 뜻을 내 것으로 만들고 세상에 실천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중용은 이렇게 사람이 하늘 뜻을 이루려면 3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하늘 뜻을 받고 태어난다, (). 하늘이 나에게 준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 하늘이 나에게 준 뜻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 (). 중용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하늘 뜻을 받고 태어나는데 하늘 뜻대로 사느냐, 아니면 내 마음대로 사느냐 하는 것은 나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중용의 시각에서 보면 예수님이야 말로 하늘 뜻을 깨달으시고 그 뜻을 위해 평생을 사심으로서 하늘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태어날 때 하늘 뜻을 받으시고(), 그 뜻을 깨닫기 위해 세례를 받으시고(),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용에서 말하는 성, , 교를 다 이루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땅의 자녀는 하늘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려고 세례를 받았고 하늘 아버지는 땅의 자녀를 보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땅과 하늘이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회개와 결단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열심히 인생을 계획하는 것을 보시며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이 큰일을 했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위해 열심히 살려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뜻대로 세상 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열심히 인생을 개척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따뜻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청년 여러분을 예뻐하시고 여러분을 도와주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딸이요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미래로 나아가는 청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Youth Sunday, I am well pleased with you

Mark 1:9 - 15


In those days Jesus came from Nazareth of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And just as he was coming up out of the water, he saw the heavens torn apart and the Spirit descending like a dove on him.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Son, the Beloved; with you I am well pleased.’ And the Spirit immediately drove him out into the wilderness. He was in the wilderness for forty days, tempted by Satan; and he was with the wild beasts; and the angels waited on him. Now after John was arrested, Jesus came 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repent, and believe in the good news.’ (Mark 1: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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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여덟번째 주일 / 2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마태복음 5:38 - 48

정해빈 목사




지난 12월 두 달 동안 주현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주현절은 주현(主顯), 주님이 나타나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을 묵상하는 절기를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으며 병자를 고치시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서에는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과 말씀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한 말씀을 꼽으라면 마태복음 567장에 기록된 산상설교/산상수훈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이 행해야 할 삶의 자세를 길게 가르치셨습니다. 산에서 설교했다고 해서 산상설교/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산상설교만 읽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내가 만일 성경의 3장만 가지고 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나는 마태복음 567장 말씀을 가지고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현절 절기를 지키면서 산상설교를 묵상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묵상하려면 반드시 산상설교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현절 마지막 주일을 맞아서 산상설교의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구약성경의 출애굽기와 비슷한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온 것처럼 예수님도 산에 올라가셔서 새로운 계명을 설교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처음 다섯 권을 모세가 썼다고 해서 모세오경이라고 부르는데 마태복음에도 예수님이 다섯 번 설교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해서 모세와 비슷하지만 모세보다 더 위대하신 분, 모세보다 더 크신 분으로 예수님을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히브리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 시내산에 도착해서 율법/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노예근성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려면 하나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십계명이다, 모세가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관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옛날 생활을 청산하고 율법/십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아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거짓말하지 말아야 하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고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아직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십계명은 하나님 백성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0가지 계명을 지키는 것이 겉으로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제대로 지키려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우상이 무엇이냐면 내가 제일 좋아하고 사랑하고 관심 갖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돈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도 쉽지 않고 거짓말 안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10가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최소한 10가지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율법, 십계명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산상설교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나의 제자가 되려면 산상설교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계명이 신앙의 기초 과정이라고 한다면 산상설교는 신앙의 고급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유대교 조상들 보다 신앙이 더 깊고 높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질 당시 마태 교회는 정통 유대교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태 교회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모인 곳이었고 일반 유대인들은 정통 유대교를 믿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이 마태 교회를 향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냥 우리들처럼 모세 오경 믿으며 살면 되지 굳이 예수를 믿으며 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마태 교회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었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상설교를 주셨습니다. 십계명이 신앙의 기초 과정이라면 산상설교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더 높고 넓게 만들고 우리를 더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유대교의 인종주의, 배타주의, 우월주의를 넘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제자의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 교회는 이렇게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수준이 비슷한 사람이 운동을 하면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탁구나 축구나 골프를 할 때, 나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과 같이 운동하면 내 실력이 올라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높은 수준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그 가르침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이 너무 수준 높아서 그 말씀대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제자가 되려면 이 말씀을 목표로 삼아야 하고 이 말씀대로 살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이 말씀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되어 있는데 여러분은 누가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는데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바리새인들이나 이방인들 보다 더 수준 높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달 전에 미국의 미셀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지원 연설을 하면서 저쪽 사람들이 반칙과 비방을 하면서 수준 낮게 나와도 우리들은 똑같이 대응하지 말고 수준 높게 가자고 연설해서 큰 박수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여러분들도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 여러분들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큰 부담이 되지 않는데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들이 하늘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살 자신이 없습니다. “완전이라는 말을 완벽하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말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사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율법보다 더 수준 높은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 율법은 모압 사람들과 같이 살지 말라고 했는데, 모압 사람 룻은 이런 인종 편견에 도전해서 나중에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구약 율법은 우스 사람들은 악하다고 했는데, 우스 사람인 욥은 동방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구약 율법은 외국인들이나 내시는 쫒아내라고 했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는 아프리카 내시 사람을 환영했습니다. 구약 율법은 사마리아 사람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과 대화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삶을 살라고 주님께서 우리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벽하게 살 수는 없지만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따라 구약 율법의 편견과 차별, 인종주의, 배타주의, 우월주의를 넘어서 원수를 사랑하고 복수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환영하며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b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Matthew 5:38 - 48


You know that you have been taught,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But I tell you not to try to get even with a person who has done something to you. When someone slaps your right cheek, turn and let that person slap your other cheek. If someone sues you for your shirt, give up your coat as well. If a soldier forces you to carry his pack one mile, carry it two miles. When people ask you for something, give it to them. When they want to borrow money, lend it to them. (Matthew 5:38 42)


You have heard people say, "Love your neighbors and hate your enemies." But I tell you to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anyone who mistreats you. Then you will be acting like your Father in heaven. He makes the sun rise on both good and bad people. And he sends rain for the ones who do right and for the ones who do wrong. If you love only those people who love you, will God reward you for that? Even tax collectors love their friends. If you greet only your friends, what's so great about that? Don't even unbelievers do that? But you must always act like your Father in heaven. (Matthew 5:43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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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일곱번째 주일 / 2월 세번째 주일

주현절, 가정의 결핍을 치료하시다

누가복음 7:11 - 17

정해빈 목사



몇 주 전에 주현절, 사회적 결핍을 치료하시다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사회적 결핍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꼭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부족할 때 우리는 무엇이 결핍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건강의 반대말이 결핍이고 결핍의 반대말이 건강입니다. 사람은 우선 신체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의식주,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좋은 음식과 깨끗한 물을 먹고 마셔야 하고 따뜻한 햇빛을 쬐어야 하고 깨끗하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아야 합니다.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체적인 조건,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집이 없는 사람도 쉼터에 가면 최소한의 의식주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신체적인 결핍이 채워질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또한 사회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속한 사회가 편안하고 안전해야 나도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회가 위험하고 공격적이고 차별적이면 사람은 불안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전쟁과 테러가 없어야 하고 인종차별과 폭력과 억압이 없어야 하고 여성과 노인과 장애인들과 어린이들이 보호받아야 합니다. 인종, , 신분, 빈부격차에 상관없이 누구나 존중받고 보호받을 때 사람은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신체적으로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속한 사회가 불안하고 위험하면 나는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나와 사회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또한 영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사랑과 보호 속에서 살아야 온전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내가 가정으로부터 사랑받고 있고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사람은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선포함으로서 사람들의 영적인 결핍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런 영적인 결핍을 채움 받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고 말씀으로 변화받기 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받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영적인 결핍을 채워주는 곳이 되어야지 반대로 사람을 억압하거나 겁 주거나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강요해서도 안 되고 무서운 하나님, 벌 주는 하나님을 증거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고 기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신체적인 결핍이 없어야 하고 사회적인 결핍이 없어야 하고 영적인 결핍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이 땅에서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신체적인 결핍, 사회적인 결핍, 영적인 결핍 뿐만 아니라 가정의 결핍을 치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결핍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정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나고 가정을 통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가정을 통해서 인생을 마칩니다. 가정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요 보호처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삶에 중요한 가정이 결핍되면 우리의 삶은 파괴되고 병들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가정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가정에 사연이 있고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나의 가정뿐만 아니라 부모와 형제까지 포함해서 생각해 보면 모든 가정에 어려움이 있고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정의 결핍을 치료해 주심으로 사람들을 일으켜 주셨고 사람들의 삶을 온전하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7장 말씀을 보면 나인 성에 사는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례 일행이 성문 앞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그 장면을 보시고 가엾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가엾게 여기셨다,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을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splagcnivzomai)라고 하는데 이 말은 애간장이 녹는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자식을 잃은 과부의 아픔을 보시고 같이 슬퍼하셨습니다. 남편 없이 홀로 아들을 키우는 과부 입장에서는 외아들이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아들을 향해서 젊은이야,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심으로 그 죽은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가정에 큰 결핍이 생긴 것을 보시고 그 가정의 결핍을 채워 주셨습니다. 이 과부의 아들이 왜 죽게 되었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죽었을 수도 있고 병들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아들을 향해서 청년아 일어나라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들이 어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자라서 젊은이답게 청년답게 살지 못하고 어린 아이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남편 없는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자식을 남편처럼 여기면서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식을 밤낮으로 끼고 살면 아들은 청년으로 자라지 못하고 영원히 어머니의 어린 아들로만 살게 됩니다. 이 아들은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와 울타리에 갇혀서 청년으로 자라지 못하고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일찍 죽게 된 아들도 불쌍하고 아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던 과부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가정을 보시면서 창자가 끊어지듯이 심히 슬퍼하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말씀하심으로 그 가정의 결핍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가정 결핍에 대한 이야기는 이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께서 병들어 죽게 된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된 딸을 고쳐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 야이로가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내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옛날에 열두 살이면 소녀인데, 아버지는 열두 살 된 딸을 어린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인 성 과부가 아들을 과보호해서 문제가 된 것처럼, 이 아버지는 열두 살 된 딸을 새장 속에 가두고 강요와 통제 속에서 딸을 키웠는지도 모릅니다. 옛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딸들을 그렇게 키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인생을 꽃 피우지 못하고 죽게 된 딸을 향해서 소녀야 일어나라말씀하심으로 그 딸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어린 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소녀로서 그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체적인 결핍, 사회적인 결핍, 영적인 결핍을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정의 결핍 때문에 고통받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결핍이나 건강의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정이 있습니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과보호로 인해 자녀들이 숨 쉬지 못하고 병 드는 가정도 있습니다. 사회가 억압적이면 가정도 억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 한국에서 군사 문화가 나라를 지배할 때는 군사 문화가 학교와 가정과 모든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결핍된 가정에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가정을 고쳐 주셨습니다. 아픈 자녀들을 고쳐 주셨고 아픈 부모를 고쳐 주셨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가정에는 사랑을 주셨고 자유가 필요한 가정에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경직된 가정을 사랑의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고 억압된 가정을 자유로운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가정의 상처를 치유해 주셔서 그 가정이 사랑이 충만하고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가정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자유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가정의 결핍을 채움받고 해결받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Epiphany Jesus healed family’s deficiency

Luke 7:11 - 17


Soon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on their way to the town of Nain, and a big crowd was going along with them. As they came near the gate of the town, they saw people carrying out the body of a widow's only son. Many people from the town were walking along with her. When the Lord saw the woman, he felt sorry for her and said, "Don't cry!" Jesus went over and touched the stretcher on which the people were carrying the dead boy. They stopped, and Jesus said, "Young man, get up!" The boy sat up and began to speak. Jesus then gave him back to his mother. Everyone was frightened and praised God. They said, "A great prophet is here with us! God has come to his people." News about Jesus spread all over Judea and everywhere else in that part of the country. (Luke 7:11 17)


Today’s gospel shows that many families in Rome’s empire experienced varying degrees of physical, spiritual, and social stress and death. Jesus’ healings are acts that repair imperial damage and enact God’s life-giving empire in restoring people’s lives. Jesus healed their families with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where the blind receive their sight,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poor have good news brought to them. Jesus healed physical, social, and spiritual deficiency. The healing power of Jesus flowed down from God to those in need. The spirit of God always runs down to fill up our wound and deficiency. We pray that God heals physical, social, and spiritual deficiency in the worl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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