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후 첫번째 주일 / 4월 네번째 주일 
부활절, 평화와 성령과 죄사함
요한복음 20:19 – 23
정해빈 목사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 교회 창립50주년감사예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오전에는 우리의 형제/자매 교회인 윌로데일임마누엘연합교회 창립50주년예배가 있었습니다. 오전 예배에 참석한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도 설교자로 초대받아서 말씀을 전하고 왔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우리 교회는 원래 1967년 토론토 최초의 한인 교회인 토론토한인연합교회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3년 전인 2004년 알파와 임마누엘, 임마누엘과 알파로 교회가 분립되었습니다. 우리와 한 몸이었던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할 수 있어서 여러 가지로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의 교회가 두 개의 교회로 나누어진 것은 분명 힘들고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분립이 갈등 때문이라고 꼭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더 넓은 지역에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의 교회를 두 개의 교회로 나누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격려하고 협력하면서 두 교회가 모교회인 토론토한인연합교회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1967년 대략 150명의 토론토 한인들이 살고 있을 때, 한인 이민자들을 위한 아무런 사회적 영적 단체가 없을 때, 몇몇 선구자들은 새로운 이민자들을 사랑으로 환영하고 그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우리들은 새로운 땅에서 우리의 언어로 예배드리고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둘째, 우리들은 우리의 고유한 문화, 전통, 언어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셋째, 우리들은 장로교단이나 감리교단과 같이 특정한 교단에 속한 교회가 아니라 캐나다연합교회에 속한 교회를 원한다. 왜냐하면 캐나다연합교회가 선교사들을 통해서 한인들을 도왔고, 캐나다연합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한국 교단이 아니라 캐나다연합교회에 가입해서 캐나다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협력하며 살기 원한다. 이러한 세가지 원칙에 근거해서 선구자들은 토론토 최초의 한인교회인 토론토한인연합교회를 1967년에 세웠습니다. 지난 역사를 회고하며 우리들에게 이런 아름다운 전통을 물려준 선배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교회 역사에 2가지 특징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교회는 세상에 흩어져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들을 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큰 교회로 성장하는 교회가 있고 반대로 계속 나누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후자에 속합니다. 우리 교회는 나누어지는 교회가 되었고 그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많은 교회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나누어지지 않고 계속 커 가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커야 세상에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가 크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크면 자기 힘을 자랑하고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에 영향력을 행세하려고 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교회는 계속 커지는 교회가 아니라 나누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키는 교회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토론토한인합창단, 토론토한인방송국, 신문사, 토론토한인노인회 같은 단체를 만들어서 한인 사회를 섬겼습니다.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교인들 의견이 달라서 교회가 나누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우리 교회는 대형 교회가 아니라 작은 교회, 세상에 흩어지는 교회, 사회 정의를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너희는 세상에 흩어져서 세상을 축복하고 세상을 섬겨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이런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도님들 우리 교회가 큰 교회가 아니라고 해서 아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작아야 우리들이 겸손해 집니다. 교회가 크면 힘 자랑하고 숫자 자랑하기가 쉽습니다.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어린이와 젊은이, 나그네와 난민, 이민자와 어르신들을 환영하며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자랑이요 장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환영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서울 사람도 부산 사람도 오는 교회, 젊은 사람도 오고 나이드신 분들도 오는 교회, 북한 사람도 오고 남한 사람도 오는 교회, 옛날에 이민온 사람도 오고 최근에 이민 온 사람도 오는 교회, 손님들, 유학생들 나그네가 오는 교회, 신앙을 뜨겁게 믿는 사람도 오고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믿는 사람도 오는 교회,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함께 예배드리고 예배와 친교를 통해서 주님을 닮아가는 교회가 우리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했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과거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부활절 4월 16일은 한국에서 세월호 사고가 난지 정확하게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느 기독교 신문에 이 사고로 손녀 딸을 잃어버린 어느 할머니 장로님의 간증 기사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50년 동안 감리교 한 교회만 섬겼어요. 그런데 사고가 난 뒤 보니까 내가 한 게 신앙생활이라 할 것도 없더라고요. 신앙생활이 그저 내 중심으로, 내 새끼, 내 것만 생각하고 편리하게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나를 보고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르겠다' 말씀하실 것 같아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억눌리고 억울하고 아프고 병든 사람 위해서 오셨는데 저는 신앙생활 하면서 그런 신앙생활 해 본 적이 없어요. 누가 아프다고 해도 나만 안 아프면 되고 억울해도 나만 안 억울하면 되는 거지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사회 일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냥 나만 편안하게 잘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주님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이 장로님은 손녀 딸을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내가 너무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다시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첫째,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성령을 받으라는 헬라어 말은 성찬식 할 때 “이 빵은 나의 몸이니 받아먹어라“ 할 때의 ”먹어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부활한 예수님을 받아먹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심장이 안 좋은 사람이 심장 이식을 받아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심장을 이식받아서 부활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심장이 내 안에 있으니 나는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나를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분노와 증오와 미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마음이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치료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부활 백성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면 세상은 변화될 것이지만 부활 백성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죄와 폭력과 어둠 속에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했던 제자들을 주님께서 다시 찾아가셔서 그들을 다시 일으키신 것처럼, 부활은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좁은 신앙에서 넓은 신앙으로, 개인적인 신앙에서 사회적인 신앙으로 변화되어서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부활 신앙입니다. 2000년 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세상에 나가 인종차별, 신분차별, 빈부차별이 가득한 세상을 용서하고 치료함으로써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갔습니다. 죽음을 몰아내고 생명을 선포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일으켰습니다. 창립50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 바로 이런 사명인줄로 믿습니다. 2000년 전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하늘의 평화를 전하고, 생명의 영, 성령을 전파하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용서하고 변화시키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eace, Holy Spirit and forgiveness
John 20:19 – 23

When it was evening on that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and the doors of the house where the disciples had met were locked for fear of the Jews,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After he said this,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his side. Then the disciples rejoiced when they saw the Lord. Jesus said to them again,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so I send you.’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to them, ‘Receive the Holy Spirit. If you forgive the sins of any, they are forgiven them; if you retain the sins of any, they are retained.’ (John 20:19 – 23)

Today’s worship service reminds us of our church history. In 1967, when 150 Korean immigrants lived in Toronto, and there was no social and spiritual communities for Korean immigrants, some pioneers thought that they needed a church first who welcomes new immigrants and encourages them to start a new life in Canada. They said clearly why they need a church. They said, “First, we need a place to worship God and learn the Bible with our own language in a new country. Second, we need a place to pass on our own culture, tradition and language to our next generation. Third, we want a church, not belonging to any specific denomination, but belongs to the United Church of Canada, because the United Church helped Koreans many ways and the it always welcomes everyone with open mind.“ Keeping these three principles in mind, they built the first Korean Church in Toronto, called Toronto Korean United Church(TKUC) in 1967.

The resurrection is to stand up again from failure, just as the Lord went back to his disciples and raised them back to the witness of the risen Christ. Resurrection changes our narrow and personal faith into a deep, wide, and social faith. Disciples embraced the heart of the resurrected Jesus, and went out into the world to change racism, discrimination, and discrimination into justice and peace. I believe that this mission is the mission of our church that will celebrate its 50th anniversary. Just as the disciples did 2000 years ago, we are also called to bring into the world the peace of heaven, the Spirit of life, and the power of forgivenes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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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 4월 세번째 주일 
요한복음(John) 11:38 - 44
부활절, 돌을 옮겨 놓아라
정해빈 목사



우리는 오늘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부활 능력을 증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희망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연약한 꽃 한송이가 딱딱한 겨울 얼음을 뚫고 땅위로 올라오듯이 부활은 딱딱하고 어두운 죽음을 뚫고나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줍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현재에서도 일어납니다.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미래의 부활이라면 슬픔과 절망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은 현재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셔서 무덤 속에 갇혀 있는 나사로를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3가지 말씀을 자세히 보면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가두고 있는 무덤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두고 매장하는 무거운 돌문, 사람을 질식하게 만들고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게 만들고 병들게 만드는 차별과 억압의 문, 사람을 가두고 억압하는 죽음의 문을 치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덤 문을 여시지 않고 우리들에게 무덤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돌문을 옮겨야 합니다. 우리가 억압과 차별의 문을 치워야 합니다. 부활은 무거운 돌문을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첫번째 능력입니다.


두번째로 주님께서는 “나사로야, 밖으로 나오너라”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에 갇혀 있지 말고, 동굴에 갇혀 있지 말고 밝은 생명의 세계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죽음의 돌문에 갇혀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나사로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외쳤을 때, 나사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부활은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죽음과 어둠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무덤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덤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과거의 죽음과 상처와 기억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 계시는 은혜의 세상으로 나와야 합니다. 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밖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두번째 능력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풀어서 가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똘똘 묶고 있었던 천과 수건을 풀어주고 새 옷을 입혀서 나가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풀어주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죽음의 옷을 벗기고 자유의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병들어 죽게 만들었던 사탄의 권세를 쫓아내고 생명의 옷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은 우리의 희망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가두는 죽음의 문을 열라고 말씀하시고 어두운 곳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가두는 억압의 옷을 벗겨 주시고 은혜와 생명과 자유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저 죽음의 문을 열어라, 나사로야 밖으로 나오너라, 나사로의 결박을 풀어주고 새 옷을 입혀서 걸어가게 하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음성이 부활의 능력이요, 영광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죽음의 문을 여시고 우리를 밖으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 옷을 입혀주시는 주님의 부활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Resurrection, take away the stone

John 11:38 - 44


Today we celebrate Resurrection, the risen Christ, and God's victory over death. Resurrection is our hope and God's promise for new life. Easter is to proclaim that death cannot win over life, and darkness cannot suppress light. Just as a small flower breaks through the winter ice and rises to the ground, Resurrection breaks through darkness and creates a new life. Resurrection occurs not only in the future but also in the present. If future Resurrection means to make the dead alive, present Resurrection means to raise us from sorrow and despair.


According to today's scripture, Jesus went to Lazarus who was already dead and raised him up. According to today’s passages, Jesus showed us through his three words, what the true meaning of Easter is something like. First, Jesus said to the people, "Take away the stone." Easter is to open and remove the stone door that locks people up in the darkness. Easter begins when we take away heavy stone doors, moving away the barriers of discrimination and oppression that make people die and ill. Moving away the stone, this is the first symbol of Resurrection. Second, Jesus said to Lazarus, "Come out, Lazarus!" Jesus told him not to be trapped in death, but to come out of the tomb. When Jesus cried out to Lazarus, Lazarus heard the voice of the Lord and came out. Easter is something like to raise someone up and to call someone out of the door of death and darkness. Even today Jesus talks to those inside the darkness, "Dear my daughter and my son, do not stay inside darkness and despair. Rise up and come out of the tomb." Calling someone out from darkness, this is the second symbol of Resurrection. Third, Jesus told people to let Lazarus go free. He told them to loosen the cloth and the towel that were keeping Lazarus tight, and let him go out with new clothes. Resurrection is to release someone and to give freedom to those living without freedom. Today's scripture shows us that Easter means to strip the clothes of death and put on the new clothes of freedom. It is to cast out the power of Satan that made Lazarus sick and die and to wear the new clothes of life. Letting someone go free and putting on new cloth, this is the third symbol of Resurrection.


Dear beloved believers, Resurrection is our hope and God's promise. Even today, God gives us the power of resurrection. Even today, God opens the door of death, calls us out of darkness, takes away the clothes of oppression, and gives us the clothes of grace, life, and freedom. "Open the door of death, Lazarus, come out, let his strap loose, and put on new clothes to walk." I believe that this voice is the voice of resurrection and the voice of victory and glory. I sincerely hope that everyone will see the risen Christ who not only opens the door of death and calls us out, but also put new clothes and let us go free into the new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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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 4월 두번째 주일

마가복음 14:3 - 9

사순절, 사랑은 거룩한 낭비

정해빈 목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마지막 일주일을 묵상하는 종려주일/고난주일이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4장에는 수요일에 있었던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 한 여자가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이 향유를 팔면 300 데나리온 정도 되는데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1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니까 300 데나리온은 1년 품삯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를 괴롭히지 말아라. 이 여자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 중에서 최고의 칭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 중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같이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이 사람의 이야기도 같이 전파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파될 때마다 복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예가 필요한데 이 여인이 한 행동이 가장 좋은 예로 소개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행동에 크게 기뻐하시고 감동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목할 만한 사실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이름없는 한 여인이 예수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권위있는 남자 예언자가 다른 사람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그 사람을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권위있는 남자 예언자가 아니라 한 이름없는 여인이 그동안 모아두었던 기름을 예수님 머리에 부었습니다. 남자 예언자만이 기름을 붓는 것이 아니라 여성 예언자도 기름을 부을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서 권위있는 남자 예언자만 기름을 부을 수 있는데 네가 왜 나에게 기름을 부었느냐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여인의 행동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히브리어로 메시야라고 부르고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한 번도 당신이 메시야/그리스도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가복음 14장 바로 이 순간 이 여인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기름부음 받은자, 메시야/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그리스도가 되려면 누군가가 자기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글자 그대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 머리에 기름을 붓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이 여인만이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메시야/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고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이 여인의 헌신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은 글자 그대로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왕이나 대제사장이 취임할 때 성전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전통이었습니다. 보통 왕이나 대제사장은 화려한 성전에서 크고 웅장하게 취임을 하고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문둥병을 앓았던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중에 이름없는 한 여인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기름부음은 왕이나 대제사장의 기름부음과 달랐습니다. 왕이나 대제사장은 취임할 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장례식을 앞두고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메시야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길 때, 자기 목숨을 내어줄 때 진정한 메시야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주님,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는 주님, 바로 이 주님이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그리스도/구세주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이 여인만이 주님이 영광의 메시야가 아니라 고난과 섬김의 메시야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고난을 거부하였다가 책망받았고 다른 남자 제자들도 마지막에는 다 주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오직 이 여인만이 잡히시기 전날 밤, 주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이 메시야/구세주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기름을 부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기름을 부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곡식 제사(소제)를 드릴 때 곡식을 가루로 만든 다음 가루에 기름을 부었고 또 옛날에는 장례를 치를 때 시신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제물로 바쳐질 것이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다른 제자들이 저 향유를 팔면 300 데나리온인데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고난이 닥쳐올 것을 알고 계셨던 주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신 주님이야 말로 가장 가난한 분이셨고 가장 고통받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자신의 머리에 기름 붓는 것을 보시며 큰 위로와 용기를 얻으셨습니다. 행동하지 않고 입으로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사랑과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이 여인도 같이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무엇이 기쁜 소식일까요? 섬기는 사랑, 자기를 주는 사랑이 기쁜 소식입니다. 주님은 자기 몸을 우리들에게 주셨고 이름없는 여인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비싼 기름을 마지막 길을 가시는 주님께 드렸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기쁜 소식은 사랑이며 사랑은 아낌없이 자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낭비입니다. 낭비는 낭비인데 거룩한 낭비요, 아름다운 낭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거룩한 낭비를 실천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심정으로 그동안 모아두었던 기름을 붓는 것을 보시고 이 여인이 복음의 정신을 삶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도 같이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딱 한번쯤 아낌없이 주는 사랑, 거룩한 낭비를 실천하는 사람은 복음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도 행복할 것이고 사랑을 받는 사람도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사랑을 실천할 때, 거칠고 삭막한 세상은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아낌없는 사랑을 실천하셨고, 이 여인은 귀한 기름을 부음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과 여인을 따라 자기를 주는 사랑, 거룩한 낭비를 실천하는 사랑,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love is holy waste

Mark 14:3 - 9


While he was at Bethany in the house of Simon the leper, as he sat at the table, a woman came with an alabaster jar of very costly ointment of nard, and she broke open the jar and poured the ointment on his head. But some were there who said to one another in anger, ‘Why was the ointment wasted in this way? For this ointment could have been sold for more than three hundred denarii,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And they scolded her. (Mark 14:3-5)


But Jesus said, ‘Let her alone; why do you trouble her? She has performed a good service for me. For you always have the poor with you, and you can show kindness to them whenever you wish; but you will not always have me. She has done what she could; she has anointed my body beforehand for its burial. Truly I tell you, wherever the good news is proclaimed in the whole world, what she has done will be told in remembrance of her.’ Amen. (Mark 14:69)


The woman in Bethany anointed Jesus' head to proclaim Jesus as the Messiah/Christ, which means the one anointed, and to prepare for the funeral of Jesus. She poured expensive oil on his head because she knew that Jesus was the Messiah of suffering and service. Jesus was so much touched by her dedication that he said wherever the good news is proclaimed in the whole world, what she has done will be told in remembrance of her. Just as Jesus showed us his generous love by giving himself to us, the woman also showed us sacred waste along with the Lord. Self-giving love and sacred waste save the world. Jesus invites us into this holy love.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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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 4월 첫번째 주일

사순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 - 29

정해빈 목사




사순절을 맞이해서 고난에 대해서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워낙 무겁고 심각하기 때문에 고난에 대해서 설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독교 신앙의 절반이 고난에서 나옵니다. 기독교 신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의 50%를 차지하고 부활이 나머지 50%를 차지합니다. 만약 십자가/고난을 신앙에서 빼버리면 기독교 신앙의 절반이 없어지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무겁고 심각하기는 하지만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 거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깊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종교들 중에서 기독교만큼 고난의 문제를 깊이 씨름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불교는 사람이 어리석고 아집과 인연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음과 아집과 인연과 집착을 버리고 도를 닦으면 고난에서 벗어나서 열반, 해탈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분명히 불교의 가르침에도 수긍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연약하기 때문에 생로병사를 겪는 자연스러운 고난도 있고, 어리석음과 아집과 인연과 집착 때문에 겪는 고난도 있지만 때로는 억울한 고난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가지고 씨름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받으셨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가지고 씨름하다 보면 고난이 주는 깊은 영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고난이라는 주제가 너무 무겁고 심각하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절반이 고난에서 오기 때문에 고난을 가지고 씨름해야 합니다. 고난을 씨름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깊은 깨달음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신앙을 온전하고 풍성하게 해 줍니다.

 

고난을 바라보는 몇 개의 시각이 있습니다. 몇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이 다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다 사라질까요?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인 야곱은 말년에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지만 동시에 많은 고난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없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놓으신 약간의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우리에게 약간의 고난을 남겨주셨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다 없어진다고 믿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서 기복신앙/번영신앙/부적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옛날 사람들은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재앙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다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그런 신앙은 기복신앙/번영신앙/부적신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남겨놓으신 약간의 고난이 있습니다.

 

둘째로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나중에는 큰 축복을 주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실제로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서 13년 동안 고생했지만 나중에 13년보다 훨씬 더 긴 세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도 처음에는 큰 고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어버렸지만 나중에는 잃었던 재산의 두 배를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고난을 잘 견디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그 고난을 잊을 정도로 큰 축복을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런 신앙이 맞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고난을 잘 견디면 나중에 더 큰 축복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런 설명에 해당되지 않는 고난도 많이 있습니다. 고난을 잠깐 견디고 났더니 나중에 더 큰 축복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들 중에는 평생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사람들 중에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그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신앙이 바로 이 신앙입니다. 누구나 고난을 겪으면 힘들고 좌절합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만날 때에 그 고난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더 가까이 바라보고 이웃을 더 가까이 바라보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바라보게 됩니다. 고난을 운명 탓이다, 팔자 탓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고난을 만날 때에 무조건 피하려고 하지 않고 그 고난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고난을 통해서 인격이 성숙하고 진리를 깨닫고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사람은 언제 하늘을 진리를 깨달을까요? 어떤 사람이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저절로 진리를 깨닫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받을 때 비로소 확실하게 전에 알지 못했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우리를 깨우쳐 주고 고난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고난이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사랑을 배웁니다. 고난은 나를 깨우쳐 주는 영적인 선생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고난을 만날 때에 무조건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그 고난을 바라보고 이 고난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고난을 잠깐만 견디면 더 큰 축복이 온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고난을 신앙의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그 고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 1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남겨놓은 고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고난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모든 고난을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무거운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받으신 똑같은 고난을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99%의 고난을 짊어지시고 우리들에게 1%의 고난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이 이 뜻입니다. 1%의 남은 고난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유익이 아니라 약간의 고난이 남아있는 것이 유익입니다. 왜냐하면 그 약간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게 되고,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되고, 고난이 주는 깊은 신앙적 의미를 깨닫게 되고, 더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고난이 없어진다고 믿는 신앙도 잘못된 신앙이고, 하나님께서 처음에 고난을 주시지만 나중에 몇 배의 축복을 주신다는 신앙도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셨고 아직 남아있는 1%의 고난을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는 신앙이 가장 성숙한 신앙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병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셨는데 잘못된 종교와 잘못된 권력이 주님을 미워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고난받을 필요도 없고 상처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난받으셨듯이 신앙인들은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놓으신 1%의 고난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억울한 사람들과 억울함을 함께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혀 줍니다. 고난의 흔적이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저희들도 사랑과 섬김과 나눔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고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what is lacking in Christ’s afflictions

Colossians 1:24 - 29


I am now rejoicing in my sufferings for your sake, and in my flesh I am completing what is lacking in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that is, the church. I became its servant according to God’s commission that was given to me for you, to make the word of God fully known, the mystery that has been hidden throughout the ages and generations but has now been revealed to his saints. To them God chose to make known how great among the Gentiles are the riches of the glory of this mystery, which is Christ in you, the hope of glory. It is he whom we proclaim, warning everyone and teaching everyone in all wisdom, so that we may present everyone mature in Christ. Amen. (Colossians 1:24 28)


Today's scripture tells us that Christ has left sufferings to us so that we fill the remaining suffering of Christ. Believing God does not mean that we will not face any hardships or troubles. Many people think that suffering is passed for a while, and if we endure sufferings coming to us shortly, God will give more blessing than before. That faith is somewhat correct and meaningful but misses an important truth. Although Christ has took almost all the sufferings, but he also left small hardships to us so that we learn spiritual truth from that hardship and follow Christ by carrying our cross. Christ calls us to bear the remaining 1% of suffering that Christ left to us.


Christ suffered because he healed the sick, fed the poor, and forgave sinners. Corrupt political and religious powers persecuted Jesus so that he could not love them. If we do not love God or neighbors, we would not have to suffer or be hurt. But as the Lord suffered, we are also called to follow the way of love and sacrifice. That is the suffering Christ left behind us. We share the pain with those in grief and with those who are treated unfairly. The church with signs of hardships is truly a living church. As Jesus did not hesitate to carry the cross of love, we are also called to follow Jesus by carrying our cross of suffering. Today’s scripture does not say to avoid or deny suffering, rather say to bear the little suffering left behind by Chris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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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네번째 주일 / 3월 네번째 주일

사순절, 고난의 주님을 따라갑니다

마태복음 16:21 - 28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6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 시몬 바요나였는데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으로 바꾸어 주시고 너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주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서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하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구세주/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기 때문에 너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떠받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처음에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해서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주님께서 고난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칭찬을 받자마자 책망을 받았습니다. 교황이 순식간에 사탄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책망 받은 것은 그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난을 빼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기 때문에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고난을 인정하지 않으면, 주님의 고난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님의 고난을 따라가지 않으면 주님을 향한 고백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는 당연히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했다고 해서 저절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고백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어떤 고백이냐가 중요합니다. 고난이 빠진 고백은 진정한 고백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빼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자칫하면 그 고백은 사탄이 될 수도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그 고난을 따라가겠다는 고백이 있어야만 진정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이미지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의 그리스도이고 또 하나는 고난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영광의 그리스도와 고난의 그리스도가 정확하게 반반씩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마가복음이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중간 8장을 기준으로 앞부분은 영광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적혀 있고 뒷부분은 고난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28장으로 되어 있는데 대략 절반이 되는 16장에서 앞뒤가 구분이 됩니다. 복음서의 전반전은 영광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전은 고난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6장 말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바로 이 말씀을 시작으로 앞부분은 영광의 그리스도가 기록되어 있고 16장부터 고난의 그리스도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의 앞부분에는 예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영광의 그리스도와 고난의 그리스도가 있는데 제자들은 영광의 그리스도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시야는 큰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하고 우리들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우리들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메시야는 메시야가 아니다, 만일 메시야가 힘 없이 고난받는다면 그것은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에 영광을 보여주시고 나중에 고난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 아들로서 영광과 능력도 있지만 동시에 고난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 받으셨고 우리가 받는 고난의 현장을 찾아오셔서 우리들 곁에서 우리들과 함께 고난받으셨습니다. 어느 집에 아빠와 아이가 있는데 아빠가 바빠서 아이와 잘 놀아주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아빠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사주었습니다. 장난감도 사주고 옷도 사주었습니다. 아이는 처음에 원하는 것을 다 사주는 아빠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빠, 나는 더 이상 장난감이나 옷 필요없어. 나는 아빠가 그냥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같이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내가 아플 때나 슬플 때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 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에게는 장난감을 사주는 능력있는 아빠도 필요하지만 내 옆에서 항상 나와 함께 있는 아빠, 나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아빠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우리가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마음이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내려가셔서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사랑 중에서 가장 큰 사랑은 고통받는 사람 곁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영광의 그리스도만 좋아하고 고난의 그리스도를 거부했을 때, 고난받는 사람들 곁에 서 있지 않으려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런 생각은 사탄의 생각과 같다고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그리스도/구세주/메시야로 고백하는 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영광의 주님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고 고난의 주님에 대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영광의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온 세상을 정의롭게 통치하실 것을 믿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따라가는 교회가 참다운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긍정의 힘, 행복의 비결, 기도 응답, 행복한 인간관계같은 책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목회하는 조엘 오스틴이라는 분이 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한때 큰 인기를 끈 적도 있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책들이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성도님들, 신앙에 도움이 되는 책들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 믿고 복 받고 형통하고 성공하는 내용은 많은데 고난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고난받으셨나, 왜 이 세상에 고난이 많은가,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웃의 고난에 대해서는 눈 감고 영광과 성공만 바라보는 신앙은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우리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고난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고난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만일 우리들이 영광만 찾으려고 하고 예수 믿고 나만 축복받으려고 한다면 그런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난받는 사람들 곁에 서 있는 신앙,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는 신앙, 고난의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사순절을 맞아 고난받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고난의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we follow the Lord of suffering

Matthew 16:21 - 28


I will give you the keys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whatever you bind on earth wi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will be loosed in heaven.’ Then he sternly ordered the disciples not to tell anyone that he was the Messiah. From that time on, Jesus began to show his disciples that he must go to Jerusalem and undergo great suffering at the hands of the elders and chief priests and scribes, and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And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saying, ‘God forbid it, Lord! This must never happen to you.’ But he turned and said to Peter, ‘Get behind me, Satan! You are a stumbling-block to me; for you are setting your mind not on divine things but on human things.’ (Matthew 16:19 23)


Then Jesus told his disciples, ‘If any want to become my followers, let them deny themselves and take up their cross and follow me. For those who want to save their life will lose it, and those who lose their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For what will it profit them if they gain the whole world but forfeit their life? Or what will they give in return for their life? ‘For the Son of Man is to come with his angels in the glory of his Father, and then he will repay everyone for what has been done. Truly I tell you, there are som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before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 Amen. (Matthew 16:24 28)


Today’s scripture reveals that while Peter expected the Christ of glory and honour, Jesus talked about the Christ of suffering. For Peter’s understanding, Messiah/Christ should control the world with earthly power. Messiah can not and should not carry on any hardships that people are suffering in the world. But Jesus rejected his insistence and showed him as the Christ of suffering the way of serving and being with the afflicted. God's power is revealed not in walks through the pillar of power, but through the dusty alleys of weakness and misery. That is where Jesus walked. That is where he leads us to walk. That is where he strengthens us to bear the burdens of discipleship. It is his burden we take upon our shoulders. Today’s passage shows us that Jesus came to us as the Messiah, not by bringing and controlling the power, but being with us and taking our suffering and weakness instea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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