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8:20-22, 9:12-17
사람이 악해도 저주하지 않겠다
정해빈 목사

 

1. 화창하고 아름다운 9월의 네번째 주일입니다. 창조절 절기를 맞이해서 창조의 은혜와 신비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창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책 중에는 자연(하늘, 땅, 식물, 동물)이 나오는 부분을 녹색으로 표시한 Green Bibl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Green Bible을 보면 자연을 언급한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8장과 9장도 자연이 언급된 대표적인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말씀을 보면 노아 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땅을 축복하시고 아담과 무지개 계약을 맺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홍수가 끝난 후에 노아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멸하지 않겠다, 그 징표가 무지개이니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나의 약속을 기억하여라”

창세기 8장 21절 말씀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어떤 부분에서 큰 감동을 받거나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그 부분을 오랫동안 묵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8장 21절 말씀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첫째로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해서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금 전까지 사람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땅이 홍수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악을 행했으면 사람만 저주를 받아야지 왜 땅이 저주를 받아야 하나 땅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심판하려고 하니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심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구에 있는 생물 중에서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는 것도 사람이고 땅을 망치는 것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해서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땅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악하다고 해서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바로 뒤에 나옵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사람이 어릴 때부터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났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이 귀하게 창조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리켜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탄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귀하게 창조했는데 조금 지나지 않아서 악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신선하고 깨끗한 음식을 만들어서 며칠 놔두었더니 음식이 상해서 먹을 수가 없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악을 배우고 악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내가 사람을 아무리 선하게 창조하여도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악을 제일 먼저 배우는 구나 탄식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놀라운 점은 사람이 어릴 때부터 악을 행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지라도 내가 다시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악한 것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리고 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세상을 심판했는데, 앞으로는 설사 사람이 악할 지라도 두 번 다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사람이 악할 때마다 사람을 심판하신다면 수백 번도 더 심판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이 바꾸어지기를 기대하셨는데 사람이 안 바뀌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2. 자식이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은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식이 말썽을 피워서 크게 혼을 내고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럼 자식이 그 다음부터 말을 잘 듣느냐, 아니요 계속해서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말 안들을 때마다 집에서 쫓아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셨기 때문에 아무리 이 세상이 악해도 이 세상을 포기하실 수가 없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다가 마음을 바꾸시는 이야기가 여러번 나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히브리 백성들은 광야를 지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려고 하다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접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나서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니느웨로 가기 싫어하는 요나를 설득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가만히 내버려두겠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함께 이 세상을 회복하고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농부가 밭을 가는데 잡초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잡초를 뽑고 조금 있으면 또 잡초가 자랍니다. 농사 일이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잡초가 많다고 해서 밭을 버리는 농부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지으신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선하게 만드셨지만 세상은 악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고 실망스럽지만 당신께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가끔 인터넷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받았는데 앞으로 멀지 않아 큰 환난이나 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환상을 자기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이 세상을 살리기 원하십니다. 성령은 세상을 살리고 악령은 세상을 파괴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도 이 땅에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변화되어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이 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전쟁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위험한 것 중의 하나가 핵발전소입니다. 보통 [원자력발전소]라고 하는데 원자력발전소라고 말하면 왠지 안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영어로는 Nuclear Power Plant라고 했으니까 한국말로 번역하면 [핵발전소]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세월호 사고가 난 원인 중의 하나가 배의 수명을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한 것이었는데 한국 고리핵발전소도 원래 수명이 30년인데 수명을 연장해서 현재 37년째 쓰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1979년 미국, 1986년 러시아, 2011년 일본에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 분명히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고 약자를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노아의 홍수가 다시 일어나서 악한 사람들이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다 없애버렸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악한 사람들이 또 등장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분명히 악이 있지만 우리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고 새 역사를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부르셔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 역사를 만들고 계십니다. 아브라함 같은 단 한사람을 부르셔서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고대 종교를 보면 무지개는 신들이 전쟁에 나갈 때 쓰는 활을 가리켰습니다. 무지개가 활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으로 무지개 활을 하늘에 매달아 놓으셨습니다. 하늘에 매달아 놓았다는 말은 신이 전쟁에서 은퇴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전쟁을 가리키는 무지개 활이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악할지라도 다시는 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있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이 땅은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살아야 할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이 땅이 우리의 잘못으로 저주받지 않도록 땅을 경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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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4:14 - 24
자연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비
정해빈 목사

 

1. 성령강림절이 끝나고 창조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창조절 절기는 창조주 하나님과 우주, 자연과 인간에 대해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 동안 구약 성서를 중심으로 창조의 은혜와 신비에 대해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자연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하비 콕스(Harvey Cox)라는 분이 [세속 도시, The Secular City]라는 책에서 구약성서의 첫번째와 두번째 책인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인류에게 3가지 해방의 선물을 주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구약성경이 인류에게 준 첫번째 선물은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창세기는 맨 처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자연은 신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이 신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을 경배할 필요도 없고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연을 무서워하고 자연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자연에게 제사를 드리고 자연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도 산에 가면 산신령이 있고 바다에는 바다 신이 있고 나무에는 나무 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자연은 신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자연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연을 연구하고 개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성경은 인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인류에게 준 두번째 선물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바로 황제를 만나 제국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히브리 사람들은 당신들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집트를 떠나 광야로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고 싶습니다. 조상들의 땅에 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우리를 떠나게 해 주십시오.” 바로 왕이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제껏 어느 누구도 제국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국을 떠나면 죽는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히브리 사람들은 제국을 떠나 살겠다고 주장했습니다. “떠나기는 어디를 떠난단 말이냐, 너희들은 제국을 떠날 수 없다, 너희들은 노예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너희들의 운명이다” 바로가 이렇게 말하며 모세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모세의 지도력을 통해 이집트 제국을 탈출했습니다. 구약성경이 인류에게 준 두번째 해방의 선물은 제국/정치권력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우리들은 제국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떤 정치권력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미국 교회를 가보면 대부분의 교회당에 미국 국기를 걸어놓았습니다. 캐나다 교회에는 캐나다 국기가 없는데, 미국 교회는 대부분 미국 국기를 교회당에 걸어놓았습니다. 자기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교회당에 국기를 걸어놓은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국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들은 국가를 사랑하고 국가가 옳은 일을 하면 국가의 뜻을 따릅니다. 하지만 국가가 잘못된 길을 가면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권력을 무서워하지 말아라, 잘못된 세상권력이 있으면 그것에 저항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곳을 과감하게 떠나라, 이것이 구약성경이 인류에게 준 두번째 선물이라고 하비 콕스는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이 인류에게 준 세번째 선물은 눈에 보이는 우상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모든 고대 종교들은 큰 동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절을 하며 신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오직 구약성경만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사랑과 정의, 생명과 평화에 더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눈에 예쁘게 보이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사람은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물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눈에 잘 보이는 화려한 옷/보석/음식/돈 이런 것들을 갖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자유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하비 콕스가 말한 3가지 해방 중에서 첫번째 해방,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는 자연은 신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지으셨기 때문에 자연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자연은 두려운 대상도 아니고 함부로 대할 대상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를 읽다보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세상을 만드셨을까?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분이기 때문에 세상을 안 만드셔도 되는데 왜 굳이 세상을 만드셨을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고서 그 자식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세상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세상/자연은 하나님이 낳은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을 때 이전보다 더 사랑이 많아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창조하심으로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도 외로우셔서 대화하고 사랑할 상대가 필요하셔서 자연을 만드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에게 말을 걸어오신 것입니다. 말을 했다는 것은 말을 듣는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을 지어다, 해와 달과 별이 있을 지어다, 자연을 부르셨습니다. 자연을 하나님의 자녀/대화 상대/파트너/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만드신 두번째 이유는 사람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연을 필요로 합니다. 자연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자연과 더불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가나안 땅 주변에는 창조 이야기가 많았는데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신이 인간을 만든 목적은 인간을 종으로 부려먹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이 자신들을 시중들 종이 필요해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대화하고 교제하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창조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세상/자연을 만드셨고 둘째로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자연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담이 동물과 식물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말은 사람과 자연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두가지 친구를 주셨습니다. 첫번째 친구는 사람 친구이고 두번째 친구는 자연 친구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사랑을 나누고 교제할 사람 친구가 필요합니다. 아담에게 하와가 있었듯이 우리들에게는 사랑을 나눌 사람 친구가 필요합니다. 함께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이 바로 사랑을 나눌 친구들입니다. 한국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에서 같이 사는 것도 보통 인연이 아닌데,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친구 외에 자연 친구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집 안에 있는 작은 화초, 풀 한포기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자연 친구들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풍성해집니다. 만일 우리 주변에 아름다운 자연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외롭고 쓸쓸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삶의 풍성함을 위해서 사람친구와 자연친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LA에 100년 만에 가뭄이 와서 잔디에 물을 주지 못하게 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3년 전에는 저렇게 물이 많았는데 3년 후에는 저렇게 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유전을 개발하는데 물을 너무 많이 쓰고, 사람들이 집집마다 수영장에서 물을 너무 많이 쓰고, 거기에 100년만의 가뭄이 겹쳐서 저렇게 물이 다 말라버렸다고 합니다. 우스개 소리로 한국에서 캘리포니아로 이민 간 사람들이 캐나다로 한 번 더 이민가야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자연을 하나님의 신비로운 자녀로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사용하였더니 저런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자연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해와 달과 별, 산과 바다, 낮과 밤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자연을 무서워하는 것도 잘못이고 반대로 함부로 대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 사람친구와 자연친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가까운 이웃/옆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나에게 가까운 풀 한포기, 꽃 한송이, 나무 한그루를 소중히 여길 때 우리들 모두는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자연의 신비를 찬양하며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이 땅에서 복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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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2 - 22
약한 지체가 더 귀하다

정해빈 목사

 

1. 최근 카톨릭 교황(교종)이 한국을 방문해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2014년 8월에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고 작년 2013년 10월에는 전세계 개신교를 대표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부산에서 열렸습니다. 그때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부산에 몰려와서 WCC는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고 해서 행사 내내 반대 시위를 했습니다. 이번에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반대 집회를 열었습니다. 해외에서 손님이 오면 반갑게 환영을 해야지 자꾸 반대를 하니까 개신교 이미지가 점점 나빠집니다. 교황께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처럼 한국도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자연환경 관리에 대한 관심사들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한국 지도자들이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만든 [명량]이라는 영화가 사상 최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토론토에서도 지난 8/15일 부터 다운타운에서 상영을 시작했습니다. 시대가 답답하고 우울하면 좋은 영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2년 전 2012년에는 [레미제라블] 영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황제가 무너지고 자유/평등/박애 공화정이 세워졌는데, 얼마 못가서 공화정이 다시 무너지고 황제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 시절 프랑스 시민들의 저항과 슬픔을 노래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옛날 시대가 지나고 더 좋은 시대가 와야 하는데, 그런 시대가 빨리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답답해하던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의 노래가 들리는가? 성난 사람들의 노래가 들리는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사람들의 노래라네. 심방 박동 소리가 울려 퍼져 북을 울리고 내일이 밝으면 새로운 삶이 있으리라 프랑스는 혁명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나서야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12년에는 [레미제라블], 2013년에는 [변호인]이라는 영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소재로 만든 영화인데, 고생 끝에 변호사가 되어 돈을 잘 벌던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잘 그렸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서 일하다 보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결국에는 한 사람의 결단이 세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올해의 대표적인 영화로 상영 중인 [명량]도 [변호인]과 비슷한 메시지를 줍니다. 임금이라는 사람이 한양을 버리고 의주 땅으로 도망갈 때 이순신은 왜적과 싸워 나라를 구합니다. 이순신의 인기가 너무 올라가니까 잘 싸우고 있는 장군을 옥에 가두고 고문을 합니다. 이순신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임금이 아버님을 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충성을 합니까?” 말을 합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충성은 임금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하는 것이다.” 명량해전이 끝났을 때 이순신은 기뻐하는 대신에,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백성들을 생각하며 통곡을 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런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영화 주인공 같은 지도자에 목이 마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고 무섭고 권위적인 지도자는 많아도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돌리는 지도자는 많지 않습니다. 한국 뉴스를 보면 공동체를 살리는 소식보다는 공동체가 부서지는 소식이 더 많이 들려옵니다. 세월호 사고가 난지 4개월이 지났는데도 정부와 여당은 책임 규명을 회피합니다. 군대에서는 병사 한명이 구타당해 목숨을 잃었고 며칠 전에는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중학교 1학년 학생을 때려 숨지게 만들었습니다. 군대귀신, 폭력귀신이 한국 사회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괴롭힙니다. 사회의 정신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한자로 공동체(共同體)를 우리 말로 표현하면 “한 몸”이 됩니다. 공공 공자, 같을 동자, 몸 체자, 공동체는 같은 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같은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상대방을 때리고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2. 이런 면에서 볼 때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이 설교한 공동체/한 몸 신앙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바울은 로마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해외에서 중국 사람 10명이 모이면 식당을 만들고, 일본 사람 10명이 모이면 회사를 만들고, 한국 사람 10명이 모이면 교회를 만든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해외에서 10명이 모이면 회당을 만들어 그곳에서 율법을 읽고 배웠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본토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해외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한인 교회가 한인 사회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것처럼, 회당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의 대도시에는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았는데 각 민족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 모임을 통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치 경제를 유지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유럽 이민자들이 몰려왔을 때, 이탈리아 사람들이 마피아 조직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보호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원래 마피아는 이탈리아 자치 조직이었는데 나중에 범죄 집단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회당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상당한 권리와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인 회당 안에서 나름대로 차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통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어느 지방 출신입니까? 나는 사마리아 출신입니다. 아 피가 섞인 동네 출신이군요. 당신은 어느 지방 출신입니까? 갈릴리 출신입니다. 아 가난한 동네 출신이군요.” 회당에서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도 어느 지방 출신이냐에 따라서 대우가 서로 달랐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출신이면 그래도 처지가 낳았습니다. 회당 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존경해서 회당에 출입하는 이방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로마 사람이 회당에 들어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게 환영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력한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당시 로마 사회에는 노예 출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스스로 보호받기 위해서 회당에 가입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회당은 유대교의 율법과 정결법을 엄격하게 지켜야만 회당에 들어올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런 차별은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모여 교회가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 믿는 로마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대 교회도 회당이 하는 방식대로 사람들을 차별했습니다. 높은 지위가 있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크게 환영을 하지만, 노예 출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이런저런 조건을 달았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율법과 정결법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고 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설명하면서 손/발, 눈/귀를 비교했습니다. 손/발 중에 무엇이 더 귀합니까? 손이 더 귀합니다. 발은 맨 밑바닥에 있습니다. 눈/귀 중에 무엇이 더 귀합니까? 눈이 더 귀합니다. 귀는 얼굴의 가장자리 끝에 있습니다. 손/눈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교인을 가리키고 귀/발은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보잘 것 없는 귀와 발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맨 밑에 있는 발과 맨 바깥쪽에 있는 귀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몸이 건강해 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발과 귀 같은 성도들을 더 귀하게 여기는 교회가 바른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말하는 공동체와 바울이 말하는 공동체의 생각이 서로 달랐습니다. 로마 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동체 사상을 퍼트렸습니다. 노예와 주인은 한 몸이다, 노예들이 일을 잘 해야 주인들이 잘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말하는 공동체는 노예들이 희생해서 주인을 섬기는 그런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공동체는 강자가 약자를 섬기고 발과 귀와 같은 성도를 더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교회가 제국의 정신을 본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약한 지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잘못을 저질러도 책임지지 않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약자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그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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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아홉번째 주일                      
로마서 3:21-24, 10:9-13
바울의 하나님의 은혜는 공평하다
정해빈 목사

 

 

 

1. 우리는 그동안 성령강림절 절기를 맞이해서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처음 교회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도 훌륭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5명을 꼽으라면 스데반/야고보/베드로/빌립/바울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해외 교포 출신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처음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30년간 목회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갈릴리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도 목회하고 로마에서도 목회했던 베드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과 아프리카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던 빌립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이 있습니다. 해외 교포 유대인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헬라어를 쓸 줄 아는 바울이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예수 신앙이 로마 사회로 퍼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없었더라면 기독교 신앙은 이스라엘 땅에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변질시켰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바울이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계승한 진짜 제자였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했던 곳은 갈릴리 농어촌이었지만 바울이 활동했던 곳은 로마의 대도시였습니다. 삶의 활동 배경이 서로 달랐습니다. 배경과 형식은 달랐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로마 사회에 바르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다양한 글을 남겼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 덕분에 우리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에 대해서 알아야 할 주제가 참 많습니다.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삶과 신앙을 알아야 하고 바울이 살았던 로마 사회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의 전향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12지파 중에서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꼽히는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고 율법/정결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파 교육을 받았습니다. 집안과 배경과 교육에 있어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자부심/우월의식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영적으로는 스데반/예수님/초대 교인들을 만남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는 육체의 질병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강자/기득권에 섰던 사람이 약자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인종주의자/배타주의자/우월주의자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에 회심한 것도 아니었고 종교를 바꾼 것도 아니었기에 개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향을 했습니다.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으러 다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사람을 꾸짖고 정죄했던 사람이 변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처럼 처음에는 강자 편에 섰다가 나중에 약자 편에 선 사람들이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도 처음에는 이집트 제국의 왕자로 살았다가 나중에 자신이 히브리 노예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 동포들이 이집트에서 억압 받는 것을 도와주다가 이집트 궁궐에서 쫓겨나 광야로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이집트 궁궐에서 가만히 있었더라면 한평생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고통받는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덕분에 40년간 광야에서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세의 헌신 덕분에 히브리 백성들은 이집트 제국을 탈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난 세례요한도 본래는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광야로 들어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의 예언자, 재야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부패한 성전 쪽에 서지 않고 성전을 비판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부패한 권력 쪽에 서지 않고 권력을 비판하는 쪽에 섰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갈릴리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태어났다가 낮은 곳으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낮은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의 낮은 곳에 태어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육신/Kenosis/Incarnation의 신앙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2. 트리나 파울로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 Hope for the Flowers] 이라는 유명한 동화 책이 있습니다. 막 태어난 줄무늬애벌레가 어느 날 수많은 애벌레들이 하늘 끝까지 솟아있는 기둥을 따라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줄무늬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을 밀치고 경쟁하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노랑애벌레를 만난 후에는 꼭대기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줄무늬애벌레는 꼭대기에 올라가는 열망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랑애벌레를 남겨두고 다시 꼭대기로 올라가서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는데 그곳에서 그는 놀라운 사실 3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정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 둘째 그 사실을 알고도 모두 쉬쉬하면서 숨긴다, 셋째 자기가 올라왔던 기둥과 유사한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꼭대기를 향해서 무작정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편 밑에 남아있는 노랑애벌레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기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에고치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면 쉽게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상에 올라갔지만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던 줄무늬애벌레는 자신이 버리고 떠났던 노랑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을 보고는 자신도 누에고치에 들어갔다가 나비가 됩니다. 그리고는 서로 경쟁하면서 무작정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 애벌레들에게 나비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래서 꽃들에게 희망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올라가는 신앙이 아니라 내려가는 신앙입니다. 서로 경쟁하고 밀치면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애벌레 신앙이 아니라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혔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나비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과 희망을 전하는 나비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2가지 희망이 있었는데 첫째는 부활이었고 둘째는 은혜였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사람들에게 부활 신앙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열매라고 주장했습니다. 부활이 일어나려면 누군가가 죽음을 이기고 첫번째 부활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그 부활의 문을 여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닫힌 문을 처음 여는 것이 어렵지 한번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문은 쉽게 열립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모든 사람의 부활이 시작될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한 몸 때문에 부활을 더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이 부서지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몸 위에 새로운 영광의 몸이 덧입혀지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기 전에 부활이 일어나게 될 줄로 알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의 부활 신앙은 틀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부활 신앙은 죽음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신앙이라는 것을 바울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두번째 희망은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말씀을 보면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We are saved by grace through faith.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신앙이 바울을 시작으로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을 거쳐 오늘날 개신교의 중요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습니다. 햇볕과 바람과 물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에서 공평하게 내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Karis라고 하는데, 카리스마/선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에게 공짜로 선물을 주십니다.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말은 하늘에서 공평하게 내려오는 은혜를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 은혜대로 살면 구원이 온다는 뜻입니다. 은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이라면 믿음은 무엇이냐? 그 은혜를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처럼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공짜로 받았으니 은혜받은 사람으로서 감사하게 사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완벽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다 지켜야 구원받는다면 우리들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입니다. 하루하루 햇살/공기/물을 받으며 사는 삶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더 일찍 죽었을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았으니 이웃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본받아서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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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5 - 11
바울의 전향, 약자와 함께
정해빈 목사

 

 

1.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다스리던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북쪽 시리아 다소(Tarsus)라는 도시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다소는 지중해 연안의 부유한 도시였는데, 소아시아에서 아테네,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학문과 문화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다소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나름대로 부유한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태어났다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해외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50만이 살고 있었다면 해외에 사는 교포들은 200만에서 500만에 이를 정도로 해외에 사는 교포들이 본토에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해외에서 산 것은 700년 전부터 나라가 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BCE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BCE 587년에 남 유다가 망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망한 후 남쪽 이스라엘이 150년을 더 버텼지만 BCE 587년에 남쪽 이스라엘도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 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해외에 흩어져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도 예루살렘에서 700km 떨어진 북쪽 시리아 다소에서 해외 교포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해외 교포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이스라엘 12 지파 중에서 베냐민 지파에 속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사울인 것도 베냐민 지파와 관련이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저 옛날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었던 사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우리 집안에서 제일 유명한 “사울”같은 사람이 되어라 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사울로 지은 것 같습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정통 엘리트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저 옛날 다윗과 솔로몬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졌을 때, 12지파 중에서 10지파는 북이스라엘을 세웠고 2지파,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는 남유다를 세웠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갈릴리와 사마리아 중심으로 발전했고, 남유다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남유다를 세운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의 집안을 가리키고 유다 지파는 두번째 왕인 다윗의 집안을 가리킵니다. 12개 지파 중에서 10지파가 북이스라엘을 세웠으니 처음에는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훨씬 더 강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할 때는 북이스라엘이 먼저 망하고 말았습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 150년이 지난 후에 망했습니다. 이 남유다 사람들을 가리켜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말도 “유다,” 유다 지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보통 12지파 전체를 가리킬 때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부르고, 남유다 사람들,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사람들을 가리킬 때는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할 때, 가장 늦게 망한 남유다 사람들,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가 유대인 중의 유대인, 정통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첫번째와 두번째 왕인 사울과 다윗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바로 이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정통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말씀처럼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 교육을 받았고 일상생활에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더러운 것을 멀리하는 정통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한국 문화로 따지면 조선 왕조를 세운 전주 이씨, 혹은 김해 김씨나 밀양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해외 교포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사울은 자연스럽게 정통 유대교 신앙을 지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잘 유지하고 보존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스데반이라는 해외 교포가 성전을 모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그를 죽였습니다. 같은 해외 교포 출신이었지만 사울은 성전을 보호하는 정통 보수 유대인 편에 섰고 예수를 믿은 스데반은 성전을 비판하는 진보적인 입장에 섰습니다. 젊은 시절의 사울은 율법과 성전과 유대교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출세가 보장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람의 일생을 보면 살아가는 방식이 저마다 다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사람의 일생은 저마다 다양합니다. 한평생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일관되게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큰 변화를 겪으며 산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방탕하게 산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도덕적으로 바르게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젊은 시절에는 바르게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타락하며 산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정의롭게 살고 약자 편에서 살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는 강자 편에 서서 돈과 권력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강자 편에서 서서 돈과 권력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약자 편에 섰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현실과 타협하며 강자 편에 사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젊은 시절에는 강자 편에 섰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약자 편에 서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람이 젊은 시절에는 정의롭게 살아도 나이가 들면 현실과 불의에 타협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놀랍게도 젊은 시절에는 강자/기득권 편에 섰다가 나이가 들어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약자 편에 섰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전향’(傳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전향이라는 말은 이쪽 삶에서 저쪽 삶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이름도 히브리어 사울에서 헬라어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히브리어 사울이 아니라 헬라어 바울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말은 자신이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통 사울의 전향을 회심/개종이라고 부르는데 사울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회심”한 것이 아니었고,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개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울 당시에 기독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울은 회심이나 개종을 한 것이 아니라 전향을 했습니다. 삶의 기준과 가치관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과거 특권/기득권을 버렸습니다. 강자 편에 서지 않고 약자 편에 섰습니다.

 

사울이 전향한 첫번째 이유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내 생각이 변합니다. 스데반과 예수님과 초대 교인들을 만난 것이 사울의 생각을 변화시켰습니다. 스데반이 성전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죽임당했을 때, 사울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사울에게 무언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3번 나오는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맨처음 나오는 사도행전 9장 말씀을 보면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 말에서 떨어져 눈이 잠깐 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이 죽은 후에 누가가 썼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에서 사도행전과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 대신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간단하게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타나셨다” (Apokalupto/아포칼룹토)는 말은 사도행전 기사처럼 환상을 통해 나타나셨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예수께서 말씀으로 나에게 나타나셨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과 예수님과 초대 교인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배타주의자/율법주의자/우월주의자 사울이 바울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순식간에 변한 것이 아니라, 스데반과 예수님과 초대 교인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을 만난 후에 3년간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는 생각이 바뀌는 변화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출신 고향과 집안과 배경을 자랑스러워하며 기득권 편에 섰던 사울이 약자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사람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전향한 두번째 이유는 그의 약한 몸 때문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절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몸이 건강할 때는 천하에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엘리트 종교 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병을 겪으면서 비로소 약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신이 아파 보아야 아픈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자신이 신체적으로 약자가 되어 보니 사회와 종교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위해 일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2가지 사건, 영적인 사건과 육체적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첫째로 신앙의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둘째로 육체의 약함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득권/강자 편이 아니라 약자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전향,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전향은 우리들에게 참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강자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약자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향의 삶이 우리들에게도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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