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10.27 종교가 타락할 때
  2. 2014.10.20 몸으로 하나님 만나기
  3. 2014.10.16 흙 한덩이가 주는 감사 신앙
  4. 2014.10.07 눈의 우상과 귀의 말씀

창조절 여덟번째 주일
예레미야서 7:1 - 13
종교가 타락할 때
정해빈 목사



1. 많은 교회들이 10월 마지막 주일을 교회개혁기념주일(Reformation Sunday)로 지킵니다. 지금부터 497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로마 교황청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교회개혁이 시작되었고 개신교가 만들어졌습니다. 3년 후인 2017년이 되면 교회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청년들에게 10월 31일이 무슨 날이냐고 물으면 할로윈(Halloween)라고 말할 것입니다. 할로윈은 성인의 날 전야제(All Hallows' Eve)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마틴 루터는 성인 유적을 만지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미신들이 유행하는 것을 보고 로마 카톨릭과 성자의 날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가 기독교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라고 불렀는데 타 종교인들이 들으면 기분나빠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다종교 사회이고 종교 전체를 개혁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개혁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낙스와 같은 많은 신앙인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 카톨릭을 비판하면서 개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를 가리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릅니다. Protest 라는 말에는 저항한다, 개혁한다 라는 2가지 뜻이 들어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불의에 저항하고 안을 향해서는 스스로 개혁하는 것이 개신교의 정신입니다.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는 교회, 세상의 질서/논리를 따라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 예할 때 예 하고 아니오 할때 아니오 하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또한 동시에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 자기를 반성하는 교회, 진리 앞에서 겸손한 교회, 하나님 앞에서 정직되고 진실된 교회, 세상과 삶에 대해 성실하고 책임을 다하려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종교가 타락할 때(When a religion becomes evil)” 이렇게 정했습니다. 본래 종교는 가장 높은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장 높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종교는 우리들에게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고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줍니다. 뿐만 아니라 욕심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을 자유하게 합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평안과 위로를 얻고, 욕심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종교 생활을 깊이 하면 할수록 우리의 인격은 높아지고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종교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모든 종교들이 처음에는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가 변질되고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맑고 순수했던 종교의 가르침이 시간이 지나면서 딱딱해지고 변질되고 심지어는 본래의 가르침과 정반대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 변질된 종교를 믿게 되면 우리의 삶도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본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믿는 종교의 어느 부분이 변질되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종교의 본래 가르침을 믿어야지 변질된 종교의 가르침을 믿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삶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더 진실해지고 풍성해졌는지 아니면 더 억압적이 되었는지를 보면 자신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17세의 말랄라 유사프자이라는 학생이 2014년 최연소 노벨 평화상을 받아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말랄라는 파키스탄 이슬람 탈레반이 여성의 외부활동을 금지하고 여학교를 폐쇄한 것을 BBC 방송 블로그를 통해 세계에 알렸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탈레반의 총격으로 치명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또 최근 이라크에서는 수니파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라는 조직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여성들을 첩으로 삼겠다고 선언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라크에 거주하는 기독교 소수민족 야지다족을 노예로 만들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런 예들은 종교가 타락하면 가장 끔찍한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어느 종교이든지 극단적인 근본주의 신앙이 문제입니다. 며칠 전에 오타와에서는 이슬람을 믿는 청년이 총을 들고 국회 의사당에 난입해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본래 종교는 삶을 풍성하게 하고 의미있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종교가 변질되면 삶을 풍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억압하게 됩니다. 이슬람교는 말할 것도 없고 힌두교에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있어서 사람을 차별합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가장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종교전쟁, 노예무역,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제국주의 침탈 등의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2. 종교가 타락했는지 안했는지를 알 수 있는 몇 가지 지표가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들이 남들보다 우월하고 하나님이 자신들만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 종교는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들만을 특별하게 사랑한다고 믿는 신앙을 종족주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족과 우리 민족만을 특별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신앙이 종족주의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믿게 되면 나와 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고 그 사람들은 벌을 받거나 죽여도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을 점령할 때 어린아이와 가축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을 다 죽이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집트 백성들이나 가나안 백성들은 다 죽어야 한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을 아멘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본래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떠돌이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시는 이야기들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만 사랑하시고 자신들만이 특별하게 선택받았다는 종족주의/선민주의, 하나님 믿지 않는 민족들은 죽여도 좋다는 배타주의 신앙이 성경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진실된 이야기가 변질된 이야기가 같이 들어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어떤 것이 진실된 이야기이고 어떤 것이 변질된 이야기인지를 잘 가려서 읽어야 합니다.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고백한 부분을 잘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종족주의/선민주의/배타주의 신앙이 기록된 부분은 가려서 읽어야 합니다.

종교가 타락했는지 안했는지를 알 수 있는 두 번째 지표는 종교가 자기 욕망과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입니다. 자기 욕망을 추구하고 부추기는 종교, 돈과 권력과 힘을 추구하는 종교는 거짓되고 타락한 종교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자기를 비우게 됩니다. 자기 욕망을 낮추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모두 나누는 삶, 비우는 삶,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대로 타락한 종교는 욕망을 부추깁니다. 권력과 힘을 갖으려고 하고 예수 믿으면 복 받고 부자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자기를 비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자기 욕망을 채워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저 유명한 믿음 장이 나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정의와 자비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다가 고난과 시련을 받았습니다. 믿음 장에 나오는 많은 신앙의 선배들 중에 자기 욕망을 위해서 살아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서 7장을 보면 예레미야가 살았던 시대상이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소명을 받았습니다. 남 유다가 망한 이유는 정치와 종교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타락하면 그 사회에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람들 사이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인데 정치가 타락하니 억울한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사람들 사이의 문제와 갈등은 점점 심해집니다. 정치가 타락하는 것은 늘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종교마저 타락하면 백성들이 기댈 곳은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바르게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으면,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크고 화려한 성전을 자랑하지 말아라. 바른 삶을 살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신교(Protestant)의 정신이 저항과 개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불의에 저항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전통이나 구습에 얽매이지 않고 잘못된 세상 질서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동시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개혁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바깥세상을 비판하기는 쉬우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이 부책임이나 방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 신앙인은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겸손하고 성실합니다. 불의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갑니다. 교회개혁을 외쳤던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저항했습니다. 동시에 검소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고 성실한 삶을 사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

창세기 18:1 - 8
몸으로 하나님 만나기
정해빈 목사



1. 지지난 주일에 ‘눈의 우상과 귀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고대 중동 종교들이 건물/성전/무당으로 이루어진 눈의 종교였다면 히브리 종교는 귀의 종교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땅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이 무너지고 예배/제사가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은 수많은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물론 히브리 신앙에도 눈에 보이는 신앙 전통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장 옷을 입었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막/천막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막/천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임시 건물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동상 만드는 것을 금지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나중에 다윗/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는데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책이 귀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책을 읽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귀로 듣고 암기했습니다. 우리 옛날 할머니들이 심청전 같은 판소리를 몇 시간 외웠던 것과 비슷합니다. 노래방/가라오케가 없었던 시절에는 노래 가사를 다 외웠는데 노래방/가라오케가 생기면서 노래 가사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옛날 히브리 백성들이나 초대 교회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귀로 들었습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면서 말씀의 힘으로 고난을 견뎠습니다. 귀로 듣는 말씀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눈의 종교와 귀의 말씀’에 대한 결론 부분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의 종교가 아니라 ’귀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보고 즐기고 구경하는 종교, 눈의 화려함과 쾌락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종교가 아니라 말씀을 귀로 듣고 묵상하는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귀의 종교에서 몸의 종교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귀로 하나님을 듣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귀에 들리는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몸으로 살지 않으면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서기관들은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이 좋은 평신도들이었고 서기관들은 말씀을 기록하고 필사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말씀을 읽고 낭독하고 귀로 들었습니다. 툭 건드리면 말씀이 튀어나올 절도로 말씀을 많이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을 듣기만 할뿐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몸으로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몸으로 이웃을 섬기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위선자들이고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듣기만 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이 눈에 보이는 동상을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형상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내 몸 안에 모시고 살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내 몸 안에 모시고 살면 굳이 동상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 동상을 만들고 절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내 몸 안으로 모시고 살면 굳이 동상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깥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몸 안으로 모시고 살면 나의 몸이 성전이 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몸 안에 모시고 사셨습니다.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평생 몸을 움직이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본래 직업이 목수이셨습니다. 몸을 움직이시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식사하시고 병자들을 만지시고 고치시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런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하나님의 영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2.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귀로 듣는 단계에 멈추지 않고 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몸으로 하나님 말씀을 실천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 창세기 18장 1절을 보면 “주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그네 복장을 하고 나타나셨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그네 복장을 하고 나타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그네가 되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달려가 엎드려 절을 하고 우리 집에 들어오셔서 발을 씻고 쉬었다 가시라고 말을 합니다. 나그네들이 집안으로 들어오자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빵을 만들게 하고 종들에게는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를 만들게 합니다. 8절에 보면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먹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옛날 중동 지방에서는 나그네가 집에 찾아오면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만약 도움을 요청하는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 집안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온 마을의 수치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목민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정성을 다해서 손님을 대접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전통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단순한 대접에 그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했고 가장 좋은 음식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에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자신이 직접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나그네들이 하나님이시거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단순히 섬김의 마음으로 손님을 대접했을 수도 있고, 그들이 하나님이시거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들이라는 것을 알고 손님을 대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섬김입니다. 길가는 나그네를 집 안으로 초청해서 자신이 직접 몸을 움직여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손님이 식사하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나그네를 섬겼느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나그네들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으로 나그네를 섬기는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시고 내년 이맘때에 자식이 있을 것이라고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씨름을 했는데 그 사람이 몸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야곱의 몸 안에 들어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야곱의 몸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야곱의 마음이 씨름을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지 않고 몸으로 씨름을 했습니다. 몸으로 씨름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쩔룩거려야만 했습니다. 이 씨름을 통해서 잔꾀와 힘을 자랑하던 야곱이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몸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가 성경 여러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처형당하셨을 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실패와 상처의 마음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마음 속에 큰 상처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그네로 변장해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성경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 나그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제자들과 나그네가 여관 방에 모여 떡과 잔을 나눌 때에 비로서 제자들은 이 나그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말씀을 깊게 묵상하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말씀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더해서 몸을 움직여서 함께 음식을 나눌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몸이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우리의 몸이 소중합니다. 신앙의 완성은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의 몸 안에 들어와서 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도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버스/지하철을 타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바로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방을 청소하고, 이웃과 악수하고, 어린 아기들을 안아주고, 손님을 대접하고 시중드는 것 모두가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들입니다. 건강에 대한 책을 읽다가 사람에게 가장 안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운동을 안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의자에 오래 앉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래 앉아 있으면 빨리 죽고 몸을 움직여야 오래 산다고 합니다. 몸을 움직여야 내 몸도 살고 나의 신앙도 삽니다.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몸으로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108번 절을 하는 전통이 있고 이슬람교에서도 몸으로 절을 하는 전통이 있는데 기독교는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전통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래 초대 교회 전통 중에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손을 올려 기도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런 전통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완성은 눈도 아니고 귀도 아니고 몸입니다. 몸을 움직여 찬양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손님 대접하고, 꽃을 기르고, 아기들을 안아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

흙 한덩이가 주는 감사 신앙
열왕기하 5:14 - 19
정해빈 목사

 

2014년 추수감사예배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립니다. 아름다운 캐나다의 가을 하늘 아래에서 추수감사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Our home and native land, True patriot love in all thy sons command. 자유와 다양성의 땅, 정의와 조화의 땅에서 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The True North strong and free, From far and wide, O Canada, we stand on guard for thee, God keep our land glorious and free. 북쪽의 강력함과 자유로움이여! 저 광활하고 넓은 땅이여, 우리는 이 땅을 수호하러 일어서리라. 하나님, 이 땅을 영광스럽고 자유롭게 지켜주소서! 함께 노래하고 기도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추수감사의 기쁨을 서로 나누기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건강/물질/자유/인간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삶의 축복의 선물로 우리들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Thanksgiving이라는 말을 자세히 보면 감사 Thanks와 나눔 Giving이 합쳐진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에는 항상 감사와 나눔이 함께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감사로 시작해서 나눔으로 끝이 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나누는 사람이고 나누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인가? 내가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내가 감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감사하다고 말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내 삶에 나눔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감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이 너무 감사해서 그 감사의 표현으로 나눔을 실천합니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일부를 떼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합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Thanks와 giving의 뜻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풍성한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동시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나눔의 삶을 실천합니다. 가난한 이웃들과 삶을 나누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합니다. 감사와 나눔,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아름다움이요 자부심이요 자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하 5장을 보면 강대국 시리아의 군대 장군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서 피부병을 고침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아만이 살았던 시리아는 강한 나라였고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나아만은 시리아에서 자신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가 강하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할수 없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약한 나라 이스라엘 땅을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나아만은 이 과정에서 겸손과 감사를 배웠습니다. 나아만은 4번에 걸쳐 자신을 낮추어야만 했습니다. 4번에 걸쳐 자존심을 낮추고 겸손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첫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소 무시했던 약한 나라를 방문해야만 했습니다. 둘째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더니 엘리사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7번 씻으라는 말만 전해줍니다. 셋째 시리아보다 보잘 것 없는 요단강에서 장군이라는 화려한 옷을 스스로 벗고 7번 씻어야만 했습니다. 넷째 엘리사에게 감사의 선물을 드리려고 하자 엘리사가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 세상에 돈과 선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아만이 주는 선물을 거절하고 이 모든 것은 야웨/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땅 엘리사를 통해서 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권력과 돈에 무릎꿇지 않고 아무런 댓가없이 병을 고쳐준 엘리사의 신실한 삶을 통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아만은 나귀 두어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주님 외에 다른 신들에게는 번제나 희생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강한 나라에서 온 나아만이 약한 나라에서 감사를 배웠습니다. 엘리사를 만나고 요단강을 만나 몸과 마음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아만이 가지고 가겠다는 흙 한덩이는 감사함과 겸손함과 단순함을 가리킵니다. 이제부터 감사하며 살고 겸손하게 살고 단순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가리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들의 신앙은 금과 은, 돌과 철의 신앙이 아니라 흙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 강한 나라들은 금과 은, 돌과 철로 큰 동상을 만들고 큰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나아만이 살았던 시리아가 바로 그런 나라였습니다. 나아만은 림몬이라는 시리아의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히브리인들의 땅에서 참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치료의 하나님, 흙의 하나님, 자연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흙은 겉으로 보기에 보잘 것이 없습니다. 흙으로 큰 건물을 만들 수도 없고 큰 동상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흙은 제국의 나라가 아니라 평화의 나라, 자연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금과 은을 가졌어도 감사를 몰랐던 나아만, 권력과 힘을 자랑했던 나아만은 히브리인들의 땅에서 겸손함과 감사를 배웠습니다. 폭력과 제국의 신 림몬이 아니라 흙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흙 한덩이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흙 한덩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흙 한덩이를 가지고도 감사를 고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By singing, praying, giving, and sharing, we want to express our gratitude to God today. We gathered here to celebrate God's grace in our home and native land, the land of freedom and diversity, not the land of power and violence, but the land of justice and harmony. God keep our land glorious and free. We stand on guard for thee. Many people take for granted everything they have, health, wealth, freedom, and relationship. But these things do not come from our achievements. Rather these things come from God as free gifts given to us. Thanksgiving means thanks and giving together. It starts with thanks and ends with giving. Without thanks there is no giving; Without giving there is no thanks. By thanks, we express the way of giving. By giving, we express the way of thanks. The most giving people are the most thankful people. It is an express of gratitude.

We can learn from today's story what the true Thanksgiving means. The scripture says, Naaman, the Commander of the Syrian army, was the leper. He was politically powerful, financially rich, and religiously pious to God of Syria, Rimmon. Although he had everything, nothing could heal his fatal disease, leprosy. He was once Israel’'s great enemy. But he dipped himself seven times in the Jordan river and he had his body cleansed. "Now I know that God of Israel is the only God in the whole world. Would you please accept a gift from me? I am a servant of the living LORD. I swear that I will not take anything from you. If you won't accept a gift, "let me take the soil of your land. I will set up a shrine to Yahweh in my back yard and I will worship your God as my God."

He met in a different land different God, not God of the strong, but God of the weak, God of soil, God of healer, God of Israel who dwells in the weak. Compared to gold and silver, rock and steel, soil is too weak and fragile to build something. People cannot build empire with soil. Soil is the symbol of weakness and gentleness. Naaman, the Commander of Syria, promised to build a small worship place with soil and give thanks to God of soil. Today we also want to express thanks not because we have gold and silver, but because we have soil that comforts and heals us. We are called to give thanks to God not for the power and wealth, but for a handful of soil and a draft of water. Today I want you to say, "Thank God not for having as much as I can, but living together with you and your grace, living together with your nature you made." Amen.

Posted by 정해빈
,

출애굽기 20:1-4, 12-17
눈의 우상과 귀의 말씀
정해빈 목사

 

1. 지지난 주일에 구약 성경이 인류에게 3가지 해방의 선물을 주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연으로부터의 해방,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우상으로부터의 해방의 선물을 주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3번째 해방인 우상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서 좀 더 깊게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20장 말씀은 십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일까요 아니면 구원의 선물일까요? 십계명은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선물/계약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노예에서 해방하였는데 이제부터는 노예로 살지 않고, 나의 백성으로,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에서 주셨습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벌 받는다 이런 뜻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제부터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자유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해방시킨 신이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신 후에 첫째로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내 앞에서”라고 했는데 옛날 성경은 “나 외에는”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내 앞에서”가 맞을까요? “나 외에는”이 맞을까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과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의 뜻이 서로 다릅니다. 본래 히브리 성경은 “내 앞에서”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하면서 “나 외에는”이라고 번역을 했고 그 헬라어 성경을 옛날 한글 성경이 그대로 번역을 했습니다. “내 앞에서”가 맞는 표현입니다. 본래 히브리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속으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타종교인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불교 신자에게 부처님 버리고 하나님 믿으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똑바로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속으로는 엉뚱한 신을 믿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제2계명이 나왔습니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모양이든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서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보면 제1계명과 제2계명 모두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우상 숭배 금지를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우상 숭배가 하나님 신앙을 가장 크게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가 하나님 신앙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 신앙을 가장 크게 위협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아라, 눈에 보이는 것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다, 이것이 십계명 1, 2계명의 메시지입니다.

옛날 모든 종교들은 신을 상징하는 형상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종교에도 형상이 있었고 가나안의 종교에도 형상이 있었습니다. 형상의 종교는 사람을 수동적이고 기복적으로 만듭니다. 거기에는 도덕과 윤리가 없습니다. 정치/종교 권력자들은 큰 동상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동상에게 절을 하게 합니다. 이 동상에게 절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절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백성들을 통제하고 백성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인터넷으로 어떤 사진을 보았더니 북한 사람들이 큰 동상 앞에서 절하고, 남한에서도 사람들이 큰 동상 앞에서 절하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동상 앞에서 절하는 것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일제 시대에도 일제는 신사참배, 천황에게 절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도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할 때 동상에게 절을 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고 나서 이제부터는 어떤 동상에게도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2.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신이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고대 종교들이 눈의 종교라면 구약성경은 귀의 종교였습니다. 눈의 종교는 칼라 TV와 같고 귀의 종교는 흑백 TV와 같습니다. 고대 종교들은 눈의 종교입니다. 화려한 동상과 장식과 성전과 무당들이 백성들을 유혹합니다. 화려한 칼라 TV와 같습니다. 반면에 구약성경은 흑백 TV와 같습니다. 화려한 동상도 없고 성전도 없고 무당도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백성들은 주변 종교들의 조롱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서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 바벨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희들의 신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들의 신은 왜 동상이 없느냐, 너희들 신이 보잘 것 없으니까 너희들이 여기로 끌려온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백성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었던 것이 바로 귀의 종교, 말씀의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눈을 즐겁게 하는데 구약 신앙은 말씀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눈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다른 종교와 우상을 섬겼습니다. 다윗/솔로몬이 화려한 성전을 지은 것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시도였습니다. 우리도 다른 종교들처럼 눈에 보이는 화려한 종교를 가져보자는 뜻에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지나고 보니 그 화려했던 눈의 종교들은 다 사라졌고 초라하다고 비웃음을 당했던 귀의 종교, 말씀의 종교, 유대교는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나라는 망해도 신앙은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은 유대교가 말씀의 종교, 귀의 종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땅을 잃어버리고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져도 오직 말씀의 힘만으로 그 모든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위해서는 칼라 책보다 흑백 책을 보는 것이 더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눈에 화려한 책은 그 화려함에 빠져서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흑백 책은 책을 읽고 난 다음에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눈의 종교와 귀의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의 종교는 보고 즐기고 구경하는 종교입니다.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눈의 종교에는 윤리와 도덕이 없고 쾌락과 방종으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귀의 종교는 귀에 들리는 말씀을 가슴으로 가지고 갑니다.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일까, 그 말씀대로 살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깊이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귀의 종교는 삶의 종교가 되고 윤리와 도덕이 됩니다. 겉으로는 눈의 종교가 멋있고 화려한 것 같지만 그것은 보고 나면 잊혀집니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말씀은 내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나를 깨우쳐 주고 나에게 지혜를 줍니다. 고난이 있을 때 말씀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줍니다. 히브리인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땅을 빼앗겼지만 귀에 들리는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에 끝까지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개와 함께 산책을 하는데 개가 죽은 사슴의 뼈를 발견했습니다. 개가 너무 기뻐서 뼈다귀를 물고 빨고 핥으면서 팔짝팔짝 뜁니다.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는 것이 저와 같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뼈를 푹 끓이면 사골이 되듯이 주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사골 같은 은혜가 나에게 옵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즐거움도 주지만 동시에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말씀 앞에서 고민을 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신음하기도 합니다. 말씀 때문에 기뻐하고 때로는 말씀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말씀 앞에서 기뻐하는 것도 축복이고 말씀 앞에서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고 신음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시대가 부패하고 타락하며 불의가 만연할 때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들었습니다. 때로는 이른 아침에 때로는 들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들었고 그 말씀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불의를 고발하고 공의를 외쳤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언자들의 선포를 거부하고 핍박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귀에 들리는 말씀이 그들의 가슴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히브리 신앙은 말씀의 신앙입니다. 구약성경은 눈에 화려한 종교들 사이에서 귀에 들리는 말씀을 붙잡고 수천 년을 견뎌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권력/재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말씀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고난을 견딜 수 있는 것도 주의 말씀 때문이고 세상의 악을 멀리할 수 있는 것도 주의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우리들은 흔들리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시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시편 1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 모두가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여 새 힘과 지혜를 얻는 복 있는 사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