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네번째 주일 / 창립48주년기념주일
욥기, 겨울을 버티면 봄이 옵니다
욥기 1:20-22, 42:1-6
정해빈 목사

 


1. 오늘 설교 제목을 “욥기, 겨울을 버티면 봄이 옵니다” 이렇게 정했습니다. 한국은 3월이 되면 개나리/진달래가 피는데 캐나다는 2달이 늦어서 5월이 되어야 꽃이 핍니다. 오늘이 4월 마지막 주일인데 아직도 나무는 겨울 그대로이고 지난 금요일에는 살짝 눈이 오기도 했습니다. 4월 말에도 눈이 오니 캐나다 겨울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겨울이 길어서 그런지 봄이 빨리 오지 않습니다. 봄이 오려면 겨울을 잘 버텨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겨울을 잘 버텨야 인생의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겨울이 길어도 때가 되면 봄이 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48주년기념감사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교회는 우리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곳이고 쉼터와 같은 곳입니다.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이민 생활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은 삶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자랐고 한글과 한국문화를 배웠습니다. 토론토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교회로서 캐나다 한인 사회의 기초를 닦았고 이민자들의 쉼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조국의 민주화를 후원하였고 다운타운에서 청년들과 난민들과 어르신들을 섬겼습니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면서 동시에 따뜻하고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수많은 청년들과 난민들과 이민자들이 우리 교회의 도움을 받았고 우리 교회를 통해 캐나다에 정착했습니다. 긴 세월을 보내면서 때로는 따뜻한 봄날처럼 모든 것이 여유롭고 풍성할 때가 있었고 때로는 겨울처럼 어렵고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앙의 사계절을 잘 버티고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일 예배 전 성경공부 시간에 성경을 순서대로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쭉 공부하고 있는데 요즘은 욥기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매주 10장씩 읽고 와서 주일날 함께 공부하고 있는데 욥기를 읽다보니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읽어가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42장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3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책이었는데 나중에 긴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1장, 2장, 마지막 42장이 욥기의 원래 부분이고, 3장부터 41장까지가 나중에 추가된 부분입니다. 욥기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장, 2장, 42장이 신앙고백이라면 3장부터 41장은 친구들과의 토론/논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욥기의 두 부분이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1장, 2장, 42장에서는 욥이 엄청난 고난을 받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장면을 잘 표현해 놓았고 3장부터 41장까지는 고난은 무엇인가, 고난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서 욥과 3친구들 사이의 깊은 토론/논쟁을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신앙고백은 신앙고백대로 의미가 있고 토론/논쟁은 토론/논쟁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욥기의 첫 부분, 욥의 신앙을 잘 표현한 1장, 2장, 42장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욥이 동방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동방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말은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자이면서 동시에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모델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갖기도 어려운데 욥은 이 두 가지를 다 가졌습니다. 그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경건하고 깨끗하고 의롭고 매너있고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내가 사랑하는 욥을 보라고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와서 “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축복을 다 빼앗아 가면 욥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욥기에 나오는 사탄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을 가리킵니다.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께 보고합니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허락해야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욥을 사이에 놓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내기가 벌어졌습니다. 사탄이 욥의 재산을 다 빼앗아버립니다. 그 많던 가축들이 다 없어지고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서 다시 가져가신다 한들 내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우리들 같으면 물질을 잃어버리면 흥분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기가 쉬운데 욥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결같은 신앙을 지켰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하는 일이 잘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는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가 쉬운데 욥은 상황이 좋거나 안 좋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꾸준하고 변함없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욥은 신앙의 뿌리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2. 욥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본 사탄은 욥의 가족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 죽었고 욥은 병에 걸려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야만 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말하고 욥을 떠납니다. 이때 욥이 받은 충격은 재산을 잃었을 때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재산이냐 있다가 없을 수도 있고 없다가 다시 있을 수도 있지만 자녀는 잃어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의 마음속에서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하는 깊은 탄식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욥기 1장과 2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탄과 욥의 아내의 생각이 서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만큼 믿었으면 하나님이 똑같이 이만큼 복을 주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다면 무엇하러 하나님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이렇게 하여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사탄과 아내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할 바에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는 분이시라면 재앙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욥기 3장 25절을 보면 욥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침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밀어닥치고,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일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내게는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온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았는데 이웃에게 친절하고 항상 조심하면서 살았는데 이런 일이 닥치고야 말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그만큼 약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내가 바르고 조심스럽게 살아도 때로는 원하지 않는 일이 나에게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약하고 불안합니다. 아무리 조심하면서 살아도 갑자기 사고와 재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에 대한 2가지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첫째로 욥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을 바에야 하나님을 저주하라는 사탄이나 아내의 충고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지만 때로는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욥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벌을 받을 만큼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벌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자책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2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겸손을 배웁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부서지고 깨지고 바닥에 떨어져봐야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욥은 재산, 명예, 가족, 친구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아쉬울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사람은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둘째,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마지막에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고난을 버티고 견디라고 말합니다. 만약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거나 고난이 자기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하나님께서도 쉽게 잊으셨을 텐데 욥이 하나님을 쳐다보고 고난을 버티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도 부담이 많이 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내가 고난과 씨름하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실 때까지 버티고 기다리겠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장 42장에서 친구들을 책망하고 욥의 신앙을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다면 여러분 그 고난에 굴복하지 말고 고난을 버티고 씨름하시기 바랍니다. 겨울을 버티면 봄이 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자책하지 마시고 고난과 씨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고난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며 고난을 버티고 씨름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Job, spring comes if we endure winter
Job 1:20-22, 42:1-6

Then the LORD asked, "What do you think of my servant Job? No one on earth is like him--he is a truly good person, who respects me and refuses to do evil." "Why shouldn't he respect you?" Satan remarked. "You are like a wall protecting not only him, but his entire family and all his property. You make him successful in whatever he does, and his flocks and herds are everywhere. Try taking away everything he owns, and he will curse you to your face." The LORD replied, "All right, Satan, do what you want with anything that belongs to him, but don't harm Job." Then Satan left. (Job 1:8 - 12)

That servant was still speaking, when a fourth one dashed up and said, "Your children were having a feast and drinking wine at the home of your oldest son, when suddenly a windstorm from the desert blew the house down, crushing all of your children. I am the only one who escaped to tell you." When Job heard this, he tore his clothes and shaved his head because of his great sorrow. He knelt on the ground, then worshiped God and said: "We bring nothing at birth; we take nothing with us at death. The LORD alone gives and takes. Praise the name of the LORD!" In spite of everything, Job did not sin or accuse God of doing wrong. (Job 1:18 - 22)

Job said: No one can oppose you, because you have the power to do what you want. You asked why I talk so much when I know so little. I have talked about things that are far beyond my understanding.   You told me to listen and answer your questions. I heard about you from others; now I have seen you with my own eyes. That's why I hate myself and sit here in dust and ashes to show my sorrow. The LORD said to Eliphaz: What my servant Job has said about me is true, but I am angry at you and your two friends for not telling the truth. (Job 42:1 - 7)

In the Hebrew Bible, the book of Job is found in the third section, known as Ketuvim(Miscellaneous) writings, which follows the Torah and the books of the prophets. The three major presences in Ketuvim are sometimes referred to "books of truths," the spiritual truths of the Psalms, the practical truths of Proverbs, and the philosophical-theological insights of Job. The book of Job is composed of two parts: The first part is called the Fable of Job which is a very old, simple folktale of faith maintained and rewarded, found in chapthers 1, 2, and 42. The second part is the Poem of Job, a much later, more complicated work comprising the large middle section of the book.

In the Fable Job is never tempted to cry out or express anger toward God when he lost everything, his fortune and family. He tells his wife, "Should we accept only good from God and not accept evil?" When bad things happened, Job did not leave God but wrestled with God. Moreover he never agreed with the fact that bad things come from the sins he had committed. While respecting God's sovereignty and goodness, and enduring many tragedies, Job waited until he meets God and everything is finally understood. In Chapter 42, God finally appears and chastises the friends for having spoken falsely about God. But God approves Job's attitude about sufferings. We believe that spring comes only after we endure winter. Job neither cursed God impatiently nor suffered from a guilty conscience when bad things happened to him. Rather he wrestled, faced, and fought against hardships. Surprisingly, God approved his brave attitude. The Fable of Job encourages us to face all trials, not surrender to them.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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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세번째 주일
부활, 죽임당한 자들을 기억하며
마가복음 16:14 - 20
정해빈 목사

 


1. 각 종교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자세가 서로 다릅니다. 유교는 죽은 조상에게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성으로 장례와 제사를 드립니다. 죽은 자에게 정성을 다하다 보니까 장례와 제사 절차가 복잡해 졌습니다. 불교는 도를 잘 닦아서 속세의 인연을 끊고 깨끗하고 반듯하게 해탈/열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럼 기독교는 죽음을 어떻게 볼까요? 첫째 기독교는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가 무너졌습니다.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독교는 죽음이 아니라 죽임에 관심을 갖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흙에서 왔으니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문제는 이런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 일어납니다. 기독교는 비정상적인 죽음에 관심을 갖고 그 억울한 죽음에 저항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고 있다고 말씀하셨고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기독교가 비정상적인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기독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갖으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죽임의 세력에 저항하는 종교이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종교입니다.

T.S. Eliot 이라는 시인이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라고 말했습니다. 봄은 왔는데 여전히 추위와 어둠과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당시 영국 사회를 빗대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가슴 아픈 일들이 4월에 많이 일어났습니다. 오늘이 4월 19일인데,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이 일어나서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한국 최초로 민주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때 많은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또 지난 목요일이 4월 16일이었는데 지금부터 8년 전 2007년 4월 16일에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한인 이민자의 자녀가 대학생들에게 총을 쏴서 33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총을 꺼내 수업 듣던 학생들에게 총을 쐈습니다. 미국은 아무나 총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인 이민자의 자녀가 저지른 일 때문에 한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가정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한 청년이 일으킨 행동을 보면서 우리가 왜 이민을 왔는가? 왜 우리들이 그 학생을 품어주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사건은 1년 전 2014년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침몰 사고였습니다. 이 사고로 고등학생 240 여명을 포함해서 총 304명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방송에 나와 “예전에는 친척과 이웃 사람들이 철수 엄마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영희 엄마라고 부릅니다. 그만 잊으라고, 철수 이름을 부르면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동생 이름을 부르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철수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더 섭섭합니다.”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잊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오드리 헵번(1929-1993)이라는 유명한 영화배우의 아들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은행나무를 심어 “세월호 기억의 숲”을 조성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고가 난지 1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무엇이 두려운지 이리저리 책임을 회피하고 따로 시행령을 만들어서 진상규명을 방해합니다. 선진국은 대형 사고가 일어나면 대통령이나 수상이 바로 기자 회견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조취를 다 취합니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얼굴도 안보이고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배가 1시간 30분 동안 서서히 가라앉을 동안 위에서 지시가 안내려오니까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국민이 죽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신을 찾아옵니다. 내가 정부에 세금을 냈으니까 정부가 자기 국민의 시신을 찾아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돈이 많이 든다, 그냥 가슴에 묻고 살아라 이런 말을 하다가 이제 와서 선체 인양을 고려하겠다고 말합니다. 참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캐나다와 한국 뉴스를 절반씩 봅니다. 캐나다는 땅은 넓은데 특별한 뉴스가 없고 정치/경제/스포츠 같은 작은 뉴스들이 주를 이룹니다. 4월 말에 정부가 예산을 발표하는데 국민들이 저축을 많이 하게 만들겠다는 소식, 인도 수상이 처음으로 캐나다를 방문했다는 소식, 온타리오 정부가 학교 성교육 교재를 만들었는데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일부 학부모들이 반대한다는 소식, 아이스하키가 정규 시즌을 마치고 결승 리그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캐나다 뉴스는 특별한 것이 없는데 한국 뉴스를 보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어느 기업인이 비리 대상자로 몰려서 수사를 받으니까 자기보다 더 비리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나를 수사하느냐면서 그동안 뇌물 준 정치인들 명단을 적어놓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뇌물을 줄 때 만일을 대비해서 기록을 다 남겨 놓습니다. 국무총리, 비서실장, 지방자치단체장, 현재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명단이 다 나왔습니다. 누구는 대선자금으로 7억, 누구는 1억, 누구는 10만불을 주었다고 밝혔습니다. 국무총리가 비리를 척결하겠다고 몇 주 전에 발표했는데 알고 봤더니 자신이 가장 비리가 많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경제는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비리가 많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2002년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 보수 정당이 대기업들에게 협박을 해서 대기업들이 트럭에 현금을 실고 와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통째로 차를 넘겨 준적이 있었습니다. 농부가 돈 받고 상인에게 밭의 채소를 통째로 넘기는 것을 밭떼기라고 하는데 트럭으로 현금을 실고 와서 통째로 넘겼다고 해서 차떼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불법으로 기업인들에게 돈을 뜯어가고 있습니다. 기업들에게 불법으로 돈을 뜯어가는 정당은 없어져야 합니다. 캐나다 같으면 그런 정당은 해산되었을 것입니다. 1990년대에 보수당이 크게 잘못해서 169석이 2석으로 줄어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정당이 국민을 무서워합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선거 때만 되면 또 찍어주니까 정당이 계속 잘못된 짓을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다른 선진국들처럼 정직하고 깨끗하고 국민들을 존경하고 국민들을 따뜻하게 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유교는 죽은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불교는 도를 닦아서 깨끗하게 죽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죽음이 무섭지 않지만 동시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기억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을 때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세상이 무서웠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다시 일어설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예수님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꿈에도 나타나고 환상으로도 나타납니다.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 물고기 잡던 베드로에게도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 제자가 말하자 다른 제자가 예수님이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말을 합니다. 이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부활 체험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6장 12절을 보면 “그 뒤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내려가는데, 예수께서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믿는 사람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으로 말하고 손으로 뱀을 집어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고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뱀을 집고 독약을 먹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능력이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에는 2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체험이 쌓이고 쌓여서 부활 신앙이 되었고 또 반대로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고백이 쌓이고 쌓여서 부활 신앙이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고백할 때 그 죽임당한 사람은 부활하여 우리 곁에 있게 됩니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만약 빌라도가 지하에 살아있다면 마음이 괴로울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자기 이름을 매주일 마다 부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부활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계속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도 부활이고 그 사람을 우리가 계속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도 부활입니다. 부활은 다시 나타나는 것이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는 그 주님을 세상에 증언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증인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Resurrection, remembering those being killed
Mark 16:14 - 20

Very early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after Jesus had risen to life, he appeared to Mary Magdalene. Earlier he had forced seven demons out of her. She left and told his friends, who were crying and mourning. Even though they heard that Jesus was alive and that Mary had seen him, they would not believe it. Later, Jesus appeared in another form to two disciples, as they were on their way out of the city. But when these disciples told what had happened, the others would not believe. Afterwards, Jesus appeared to his eleven disciples as they were eating. He scolded them because they were too stubborn to believe the ones who had seen him after he had been raised to life. Then he told them: Go and preach the good news to everyone in the world. Anyone who believes me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anyone who refuses to believe me will be condemned. Everyone who believes me will be able to do wonderful things. By using my name they will force out demons, and they will speak new languages. They will handle snakes and will drink poison and not be hurt. They will also heal sick people by placing their hands on them. After the Lord Jesus had said these things to the disciples, he was taken back up to heaven where he sat down at the right side c) of God. Then the disciples left and preached everywhere. The Lord was with them, and the miracles they worked proved that their message was true. (Mark 14:9 - 20)

Angry relatives and families of passengers who drowned in a ferry sinking snubbed South Korea's president on the disaster's anniversary Thursday, even as she pledged to salvage the ship. Tears and grief mixed with raw fury as black-clad relatives and their supporters mourned the 304 victims of the ferry Sewol, most of whom were high school students. There's frustration among those who see their government as having failed to meaningfully improve safety standards and hold high-level officials accountable for a disaster blamed in part on incompetence and corruption. Relatives cancelled a memorial service in Ansan that thousands were planning to attend. They expressed anger over President Park not visiting the site and not providing a firm commitment for a deeper investigation into what they say is government responsibility for the sinking and botched rescue.

All the disciples scattered and hid themselves in fear when the Lord was tortured and killed on the cross. They were afraid of the Roman authorities. Some went back to Galilee which is their native place. and other back to Emmaus. Those remaining in Jerusalem locked themselves in a room to hide. But the risen Christ appeared to them repeatedly when they were fishing, walking, eating, and probably sleeping. These experiences made disciples gather again to be the first church. They preached the good news to the world. These two experiences, Jesus showing them repeatedly and disciples proclaiming Jesus to the world, made Easter possible. We can live out Easter faith by remembering our beloved ones who became victims of disaster or were killed by the immoral power in the world. We bring them again by remembering, bearing witness, and revealing the truth regarding their death. We cherish the 304 victims of the ferry Sewol in South Korea one year ago. They would be alive in our heart when we remember their unjust death. That is the Easter faith. The Lord is alive! We are the witness of that!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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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두번째 주일
부활,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요한복음 20:19 - 23
정해빈 목사

 

1. 지난 2012년에 한국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라는 기독교 기관에서 개신교 목사, 카톨릭 신부, 신학자들이 모여 부활에 대한 모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대화 내용을 요약한 책이 [내가 믿는 부활]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다양한 분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부활이 무엇인지, 부활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백하고 토론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토론회에 참여한 김경재 교수는 부활을 잘 설명한 성경 본문 2가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방금 대표 기도 후에 읽은 새창조의 선언에 나오는 사도행전 2장 24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맨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참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음의 세력이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식사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셨던 그 예수님을 죽음이 가둘 수가 없었다고 제자들은 고백했습니다. 두 번째 성경 본문은 요한복음 11장 25절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이것을 믿느냐?” 요한복음 말씀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초대 기독교가 부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부활한 것과 같다. 그 사람은 이미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다. 비록 나에게 생물학적인 죽음이 온다하더라도 나는 죽지 않고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목회자인 유경재 목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처음부터 완제품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점차 성장하며 완성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 육체적 과정을 종결하고 그 다음 성장 단계로 나아간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계속 진행 중이다. 사람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더 완전한 존재로 점점 완성되어 간다고 보았습니다. 부활에는 3가지 부활이 있는데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면서 예수 믿고 변화받고 거듭나는 것이 첫 번째 부활이고, 나중에 내가 죽고 나서 바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두 번째 부활이고, 마지막으로 주님이 다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될 때 일어나는 부활이 마지막 세 번째 부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카톨릭의 이제민 신부는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놓친 사람은 영원히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한다” 고 말했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 세상을 떠나려는 생각을 버리고 세상을 향하여 회개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 나라에 맞는 성실한 삶을 살 때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셨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전 휘장은 제사장과 일반 사람을 구분하는 천막인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는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민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갈라놓는 마음을 찢어라. 모두를 가슴에 안아라. 안지 못하는 마음을 찢어라. 이웃과 원수, 성과 속, 선과 악을 가르는 마음을 찢고 그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내 몸 안에 모시고 사는 삶이 바로 부활이다.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때를 먼 미래로 미루지 마라. 지금 당신의 몸을 쪼개라. 그분처럼 우리의 몸을 쪼개어 남에게 나누어 줄 때 우리는 그분처럼 남에게 부활의 몸이 될 것이다.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리스도처럼 성체가 되어라. 자기의 몸을 남을 위하여 쪼개라. 그리고 남의 몸 안으로 들어가 소화가 되어 사라져라. 부활의 삶은 ‘나’를 사라지게 하여 ‘세상’을 살리는데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부활에 대한 오해는 세상을 살리는 일보다 자기 사는 것에 온 마음을 쏟는 데에 있다.” 이제민 신부는 현재의 부활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삶, 내 몸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삶이 바로 부활의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2. 사람마다 부활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미래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죽음 이후에 일어날 부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에게 죽음이 오면 지금의 질그릇 같은 이 몸은 사라지게 되지만 대신 영원히 썩지 않는 새 몸을 입게 되는 미래의 부활을 강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분들은 현재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지금 내가 은혜받고 변화받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부활에 대한 강조점이 서로 다르지만 확실한 것은 부활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고 죽음을 이기는 것이고 죽음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부활을 “에게이로(egeiro)”라고 하는데 ‘일어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쓰러트리는 죽음의 세력,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세상이 무서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인사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문을 잠그는 것은 세상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무섭고 사람이 무서우면 마음의 문을 잠그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문을 여십시오. 그대는 홀로가 아닙니다. 내가 그대와 함께 할 것이니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보면 “성령을 받으십시오”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헬라어 말은 성찬식 할 때 “이 빵은 나의 몸이니 받아먹어라“ 할 때의 먹어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나의 몸을 받아먹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받아먹으라는 말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내 몸 안으로 모시라는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 죽게 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심장을 이식받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내 몸 안에 건강한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라, 나를 받아먹어라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심장이 내 몸 안에서 뛰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죽어가는 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 거친 세상을 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으므로 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나를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무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23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라는 말씀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사고를 당한 사람들,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품어주고 치료해 주는 말씀입니다. 부활 백성이 이 세상을 용서하면 이 세상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이 세상을 용서하고 치료할 수 있는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만이 이 세상을 용서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이 생전에 하신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식탁을 나누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재물의 욕심에 사로잡힌 삭개오 같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거짓과 폭력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은 변화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부활 백성에게 달려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3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둘째, 성령을 받으십시오. 나를 받아먹으십시오. 셋째, 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세상에 나아가 세상 죄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십시오.” 2000년 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인종차별, 신분차별, 빈부차별이 가득한 세상을 용서하고 치료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2000년 전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나아가 세상 죄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고 주님이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Resurrection, peace be with you
John 20:19 - 23

The disciples were afraid of the Jewish leaders, and on the evening of that same Sunday they locked themselves in a room. Suddenly, Jesus appeared in the middle of the group. He greeted them and showed them his hands and his side. When the disciples saw the Lord, they became very happy. After Jesus had greeted them again, he said, "I am sending you, just as the Father has sent me." Then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the Holy Spirit. If you forgive anyone's sins, they will be forgiven. But if you don't forgive their sins, they will not be forgiven." Amen. (John 20:19 - 23)

When Jesus' followers have secured themselves from the authorities, the risen Christ appeared in the middle of the group. He greeted them and showed them his hands and his side. "Peace be with you," Jesus gives peace that provides solace in the face of persecution, a promise of new possibilities, and confidence in his ability to overcome the world. In this Gospel, "the world" usually indicates a hostile and ignorant response to the truth that Jesus embodies. Recalling the moment when God breathed life into the original earth person in Genesis 2:7, Jesus breathes the Spirit of life into his followers in John. A new creation is afoot. This creation does not replace the world. It engages it.

Again Jesus tells his disciples, “If you forgive the sins of any, they are forgiven them; if you retain the sins of any, they are retained.” “Sin” in John’s Gospel is not primarily a moral category; rather, it is fundamentally unbelief, the refusal to receive the revelation of God in the person of Jesus. Jesus is not giving his disciples some special power to decide whose sins will be forgiven and whose will not. Rather, it means to be sent, to make known the love of God that Jesus himself has made known. As people come to know and abide in Jesus, they will be “released” from their sins. If, however, those sent by Jesus fail to bear witness, people will remain stuck in their unbelief; their sins will be “retained.”

Jesus breathes the Spirit into his followers to enliven and transform for mission. We rejoice in these gifts. By spreading the good news of resurrection to the world where the power of death dominates, and by encouraging and healing those who are weeping, we can release people from their sins and oppressions. We are called to proclaim the good news that God defeated the worldly power by raising Jesus from the dead. "Receive the Holy Spirit, receive my body and blood, let my heart beat in your body," Jesus said. As the people of Easter, we are called out to set people free from the power of death and despair. Jesus says to us, "go out and bless people with the power of lif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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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부활, 죽음을 넘는 삶
고린도전서 15:47 - 58
정해빈 목사

 


오늘은 하나님께서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날이고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참 생명으로 오신 주님,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 생명의 힘입니다.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면 다시 나뭇잎이 나오는 것처럼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 생명의 힘입니다. 오늘 부활절 4월 5일, 4월 첫째 주일 아침에 눈이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캐나다 겨울이 길어도 생명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둠이 빛을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살아나셔서 다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불의한 세력이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짧게 보면 어둠이 이기지만 길게 보면 빛이 이깁니다. 짧게 보면 죽음이 이기지만 길게 보면 생명이 이깁니다. 짧게 보면 불의가 이기지만 길게 보면 정의가 이깁니다. Easter is a high point in the Christian calendar. It is a time for joy and celebration as Jesus Christ defeated death and rose from the grave. Strange enough, we see snow in the Easter Sunday. It seems to me that April is not yet safe to change snow tires! Although Canadian winter seems to last longer, we believe that nothing can resist the spirit of Easter. In a short term death and darkness wins, but in a long term life and light wins. In a short term injustice appears to triumph, but in a long term justice wins over injustice. Resurrection is a good news, but it doesn't mean that every resurrection is a good news. If any dictator or corrupt power come to life again, that wouldn't be a good new but a nightmare to us. Today we are joyful, because Jesus, true life, true love and justice came to us again. Jesus’ resurrection marked the end of Caesar’s way of doing things. It established a new kingdom in which enemies are loved, the marginalized are given primacy of place, and the poor are blessed. In this kingdom, hierarchies are subverted, concentrated power is decentralized, and prodigal children are welcomed home.

부활이라고 해서 모든 부활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수백만 명을 죽인 히틀러나 스탈린이 다시 부활했다면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끔찍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들이나 독재자가 다시 부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끔찍한 전쟁과 폭력이 다시 부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 생명으로 오신 주님,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부활 신앙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자신의 부활을 대비하기 위해 거대한 무덤, 피라밋을 만들었습니다. 4,600년 전 수십만 톤의 돌 수천 개를 쌓아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20만 명의 노예들이 20년간 그들의 꽃다운 생애를 송두리째 바쳐야만 했습니다.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왕도 파라오처럼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 큰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무덤을 만들던 사람들은 모두 다 그 무덤에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이렇듯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부족해서 죽음 이후에도 다시 부활해서 옛날과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임한 것은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에게 임했지 빌라도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은 헤롯, 빌라도, 파라오, 진시왕, 거지 나사로를 굶어 죽인 부자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에게만 부활은 임할 것입니다. 악에 저항하다 불의한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한 사람들에게만 부활은 역사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세상의 기준보다 하나님의 기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켜 줍니다. 부활 신앙은 세상에서 인정받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켜 줍니다. 부활 신앙은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줍니다. 비록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졌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양심을 지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Paul said, "Our bodies of flesh and blood will decay. They cannot share in God's kingdom, which lasts forever. But suddenly, at the sound of the last trumpet the dead will be raised. Our dead and decaying bodies will also be changed into bodies that won't die or decay. The bodies we now have are weak and can die. But they will be changed into bodies that are eternal. Then the Scripture will come true, "Death has lost the battle!" Thank God for letting our Lord Jesus Christ give us the victory!" We believe Jesus's resurrection is the beginning of our resurrection, the first fruit of new heaven and new earth. We believe Jesus's resurrection makes it possible for his followers. We believe death is not the end but beginning of new life. We believe there is another life beyond death. Dear friends, although the power of darkness, the power of violence and injustice appears to triumph, stand firm and do not be shaken. Our loving God will hold us and bring us new life. Life, Death, Life beyond Death, God is with us.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 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이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믿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요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음을 믿습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을 믿습니다. 비록 어둠의 세력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고, 폭력과 불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여도, 정의의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희생자들과 순교자들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죽이고 또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이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죽음이 막을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불의 앞에서 무릎 꿇지 않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요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패배시키는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성도님들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멘.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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