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 5월 네번째 주일
성령님,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소서
사도행전 2:1-4, 43-4
정해빈 목사

 

 

 

 

부활절이 지나고 성령강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체험하고 새로운 교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강림절이기도 하고 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부활하시자마자 40일 동안 집중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 지 성경을 가르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을 것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는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여러분을 도와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난 후에 제자들은 계속 남아서 10일 동안 성령님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 후 50일째가 되는 오순절에 불같은 성령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부활절/유월절 날짜가 같고 오순절/성령강림절 날짜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유월절과 부활절 날짜가 같을 수밖에 없고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님을 만났기 때문에 오순절과 성령강림절 날짜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출애굽한 날을 유월절이라 부르고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을 다섯 오(五), 열 순(旬)자를 써서 오순절(五旬節) 또는 7×7=49, 칠칠절이라고 부릅니다. 출애굽한 지 50일째가 되는 오순절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또 이날 보리 추수를 했기 때문에 맥추감사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구약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해서 유월절을 지켰다면 신약 백성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해서 부활절을 지켰고 구약 백성들이 오순절에 율법 받은 것을 지켰다면 신약 백성들은 오순절에 성령 받은 것을 지켰습니다.

성령강림절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날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모임,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체험을 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개인적인 체험에 그치고 말았다면 우리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순절이 중요한 것은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 40일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집중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10일간 간절히 기도한 후 오순절에 성령을 만나 변화되어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모임, 첫 번째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로 인종과 신분과 계급과 성과 빈부격차의 장벽을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사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하나님의 영을 만나는 날이고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저 옛날 히브리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난 지 50일 만에 시내산에 도착해서 생명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원래 히브리 백성들은 노예들로 구성된 잡다한 사람들이었는데 오순절 날 시내산에서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함으로써 정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새로운 민족, 해방의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약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 옛날 히브리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차별이 없는 새로운 공동체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오순절은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는 날이요 보리 농사의 처음 열매를 거두는 날이요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 열매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고, 말씀과 성령을 받는 날이고, 처음 추수를 하는 날입니다. 억압과 차별이 없는 새로운 공동체/교회가 시작되는 날이고 우리 안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날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명절을 지키기 위해 해외에서 온 순례객들도 있었고 유대인 안에도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등 다양한 분파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인종이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도 있었고 종교 전통이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도 있었고 신분이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도 있었고 출신 지역이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처럼 인종과 신분과 계급과 성과 빈부격차의 장벽을 뛰어넘어 모이는 모임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의 제자들만이 성령의 체험을 받고 모든 차별과 장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모임/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있었고, 예수님의 가족을 대표해서 동생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여성들을 대표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고 해외 교포 2세를 대표해서 스데반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도 있었고 예수님을 흠모하여 자기 무덤을 예수님께 드렸던 시의원 아리마대 요셉도 있었습니다. 저 북쪽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사마리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해외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하에 모여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맨 처음 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가 바로 인류의 구세주 메시야이심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처음 교회는 동시에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 교회는 7명의 집사를 뽑아서 가난한 과부들을 돕는 구제 사역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맨처음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나누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유있는 교인들이 물질적으로 후원을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차별과 장벽이 무너지고 정의가 이루어지며 사랑의 나눔이 풍성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저 옛날 구약성서의 예언자 요엘이 했던 예언이 성령의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요엘2:28-29). 여기 보면 3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성령께서 오시면 첫째 아들과 딸이 함께 예언을 하고, 둘째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환상을 보고, 셋째 종들도 주인들과 똑같이 성령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가부장적인 성차별이 없어지게 됩니다. 딸과 아들이 똑같이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나이 차별이 없어지게 됩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차별받지 않습니다.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똑같이 꿈을 꾸게 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종들이 주인들과 똑같이 예언을 하게 됩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시민의 3분의 2가 노예들이었는데 성령이 오시면 노예 제도가 없어지고 억압과 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 오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받아서 개인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어둠이 물러가고 억압과 차별이 없어지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장애인들, 여성들, 노인들, 난민들, 외국인 노동자들, 동성애자들 모두를 아무런 차별없이 사랑하고 환영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어떤 보이지 않는 영이 역사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악한 영이 역사하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짓말하는 영이 역사합니다.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의 눈은 맑고 깨끗하지 않습니다. 폭력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이 역사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교회는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진리의 영, 평화의 영을 모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세상을 섬기지 않고 진리이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장벽과 차별이 물러갑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님의 오심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교회, 사랑으로 하나되는 교회, 성령님을 만나 변화받아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삶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Holy Spirit, leas us into new life
Acts 2:1-4, 43-47

On the day of Pentecost all the Lord's followers were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there was a noise from heaven like the sound of a mighty wind! It filled the house where they were meeting. Then they saw what looked like fiery tongues moving in all directions, and a tongue came and settled on each person there. The Holy Spirit took control of everyone, and they began speaking whatever languages the Spirit let them speak. Many religious Jews from every country in the world were living in Jerusalem.   And when they heard this noise, a crowd gathered. But they were surprised, because they were hearing everything in their own languages. (Acts 2:1-6)

Everyone was amazed by the many miracles and wonders that the apostles worked. All the Lord's followers often met together, and they shared everything they had. They would sell their property and possessions and give the money to whoever needed it. Day after day they met together in the temple. They broke bread together in different homes and shared their food happily and freely, while praising God. Everyone liked them, and each day the Lord added to their group others who were being saved. Amen. (Acts 2:43-47)

Today is Pentecost Sunday. Pentecost is not as well-known or as popular as the Christmas and Easter, though it commemorates a watershed event in Christian history. For Christians, Pentecost is a holiday on which we commemorate the coming of the Holy Spirit on the early followers of Jesus. Pentecost is the day on which the church was started. This is also true from a spiritual perspective, since the Spirit brings the church into existence and enlivens it. Thus Pentecost is the church’s birthday. This day became especially significant for Christians because, seven weeks after the resurrection of Jesus, during the Jewish celebration of Shavuot/Pentecost, the Holy Spirit was poured out upon his first followers, thus empowering them for their mission and gathering them together as a church.

After the Holy Spirit fell upon the first followers of Jesus, Peter preached a sermon to help folks understand what had just happened. In this sermon he cited a portion of a prophecy from Joel, “In the last days, God says,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people. Your sons and daughters will prophesy.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and your old men will dream dreams. In those days I will pour out my Spirit even on my servants–men and women alike–and they will prophesy.” (Joel 2:28-29). Whereas in the era of the Old Testament, the Spirit was poured out almost exclusively on prophets, priests, and kings, in the age of the New Testament, the Spirit would be given to “all people.” All would be empowered to minister regardless of their gender, age, or social position. The church of Jesus Christ would be a place where every single person matters, where every member contributes to the health and mission of the church.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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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 / 5월 세번째 주일
욥기, 하나님께 불평하다
욥기 7:12 - 21
정해빈 목사

 

 



1. 시편에 나오는 150개의 시 중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을 아름답고 귀하게 창조하셨는지를 노래한 시가 시편 8편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주십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게 창조하셨는지를 노래했습니다. 창세기 1장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가장 귀하게 창조하셨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귀하게 창조하시고 이렇게 귀한 권한을 주셨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한 시가 시편 8편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시편 8편처럼 사람이 아름답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기쁘고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살아있어서 좋다, 세상 살 맛이 난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온통 좋아 보입니다. 군대 간 애인에게 편지를 보내면 군대에 간 사람은 그 편지 때문에 아무리 힘든 훈련도 견딜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식을 고대하던 부부가 아기를 낳았을 때, 또는 손자 손녀를 보았을 때 아기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세상 살맛이 나고 기쁨이 넘칩니다. 직장과 가게 사업이 잘 돼서 돈을 잘 법니다. 매일 돈을 자루에 담아 가지고 올 정도로 돈이 쌓이고 재산이 늘어납니다. 그럴 때도 세상 살맛이 나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간관계가 원만할 때, 모든 가족들이 다 건강하고 행복할 때, 자녀들이 잘 사는 것을 볼 때, 날씨와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들은 살아 있는 것이 좋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편 8편이 인간의 삶을 가장 긍정적으로 표현한 시라면 욥기는 인간의 삶을 가장 부정적으로 표현한 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은 3장에서 자기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자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장 20절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왜 사람을 창조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냐고 따졌습니다. 특히 욥은 7장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부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내가 바다 괴물이라도 됩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감시하십니까?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어찌하여 아침마다 나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나를 시험하십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까?” 시편 8편에서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귀하게 창조하셨습니까? 말했는데 욥기 7장에서는 “왜 나를 괴롭히십니까? 왜 나를 지으셨습니까? 왜 나를 시험하십니까? 내 인생이 허무합니다.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8편이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 쓴 시라면 욥기 7장은 사람이 가장 불행할 때 쓴 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중간쯤 어딘가에 놓여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 쪽에 서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슬픔과 불행 쪽에 서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욥은 두 가지를 다 경험했습니다. 한 때 그는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욥은 정반대로 최악의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최고의 상황과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인지도 모릅니다.

2. 욥은 1장과 2장에서 고난 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3장이 시작되자 태도를 바꾸어서 자기 인생을 저주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욥과 자기 인생을 괴로워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욥 중에서 어떤 욥이 더 경건해 보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한 욥이 더 경건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인간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고난 앞에서 자기 인생을 괴로워하고 하나님께 불평한 욥이 더 솔직하고 정직해 보입니다. 겉으로 슬프지만 안 그런척하기 보다는 솔직하게 자기의 심정을 고백하는 사람이 더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장례가 생기면 유족들이 7일간 애도 기간을 갖습니다. 그것을 쉬브아(Shib’a)라고 부릅니다. 어느 유대교 랍비가 장례식을 인도하는데 어느 교인이 와서 자기는 지금 할 일도 많은데 꼭 애도 기간을 7일로 해야 되느냐고 자기는 하루나 이틀로 단축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그 슬픔을 충분하게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슬픔을 빨리 벗어나려고 하면 당신은 나중에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 슬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고난과 슬픔이 왔을 때 그것을 충분히 느끼고 슬퍼하고 이해가 안 될 때는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1장과 2장 보다는 3장부터 시작되는 욥의 불평이 더 인간적으로 들립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끔찍한 고난을 주십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왜 나를 치십니까?”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욥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네가 뭔데 감히 하나님께 불평하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네가 교만해서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어떤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고난을 받아들이고 순종해야지 왜 감히 하나님께 불평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한번 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이해 안 되면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불평하면 벌 받을까봐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불평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질문/호소도 할 수 있고 탄식/불평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불평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보면 저 유명한 말씀,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사랑한다는 것은 멀리서 존경하는 것과 다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속에 있는 말도 할 수 있고 호소/불평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무서운 아버지와 따뜻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가서 불평도 하고 속 이야기도 합니다. 왜냐면 어머니는 나와 가깝고 항상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허물없이 가서 투정도 부리고 불평도 하는 것입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께 투정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그것이 못마땅해서 네가 뭔데 감히 하나님께 불평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친구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변자인 것처럼 욥을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더 가까운 사람은 친구들이 아니라 욥이었습니다. 친구들이 믿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무서운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면 욥이 믿는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는 언제든지 불평할 수 있는 어머니 같은 분이셨습니다.

성경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출애굽 할 때 때로는 찬양하고 때로는 불평하면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때로는 탄식하고 불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점점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150개의 시를 보면 감사/찬양하는 시보다 하나님께 호소/탄식/불평하는 시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옛날 시인들은 기쁠 때 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훨씬 더 시를 많이 썼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렇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탄식하고 불평하면서 고난을 견뎠습니다. 우리 옛날 어머니/할머니들도 힘들고 억울할 때 교회당에서 또는 기도원에서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내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하고 탄식하고 부르짖고 불평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부를 때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삶이 힘드실 때 주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호소하십시오. 불평하십시오. 부르짖으십시오. 탄식하십시오.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고 우리를 찾아와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Job complains to God
Job 7:12 - 21

Am I the sea or a sea monster? Is that why you imprison me? I go to bed, hoping for rest, but you torture me with terrible dreams. I'd rather choke to death than live in this body. Leave me alone and let me die; my life has no meaning. What makes you so concerned about us humans? Why do you test us from sunrise to sunset? Won't you look away just long enough for me to swallow? Why do you watch us so closely? What's it to you, if I sin? Why am I your target and such a heavy burden? Why do you refuse to forgive? Soon you won't find me, because I'll be dead. (Job 7:12-21)

Our LORD and Ruler, your name is wonderful everywhere on earth! You let your glory be seen in the heavens above. I often think of the heavens your hands have made, and of the moon and stars you put in place. Then I ask, "Why do you care about us humans? Why are you concerned for us weaklings?" You made us a little lower than you yourself, and you have crowned us with glory and honor. You let us rule everything your hands have made. And you put all of it under our power. (Psalm 8:1-6)

Whereas Psalm 8 praises God who made humans with glory and honor, the Book of Job shows how the life of humans can be miserable. Psalm 8 confesses that God let us rule everything that God has made and God put all of it under our power. But Job said in chapter 3 "Why does God let me live when life is miserable and so bitter? I keep longing for death more than I would seek a valuable treasure. Nothing could make me happier than to be in the grave. Moaning and groaning are my food and drink, and my worst fears have all come true. I have no peace or rest, only troubles and worries." These two scriptures show that we are living somewhere between glory and misery, joy and sadness.

When Job was suffering from all kinds of hardships, he outcried and appealed to God. When Job complained to God, his three friends scolded him for being impious and blasphemous. But complaining does not mean disrespect. Rather we can see his honesty and integrity in his long speech. Being angry at someone who matters to us, a parent, a lover, even God, need not shatter a relationship. Anger can be a part of an honest relationship. We are getting close to God by not only singing and praising God, but also outcrying, appealing, and even complaining to God. We are able to complain to somebody, when only are we close to someone. I believe that God worth worshipping is God who prefers honest anger to flattery. When you are in adversity and difficulty, do not hesitate to call God and even to complain to God. God of love and generosity will respond to your appeal kindly.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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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여섯번째 주일 / 어버이 주일
어버이 주일, 험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창세기 47:7-12, 요한복음 19:25-27
정해빈 목사

 

1. 오늘은 5월의 두 번째 주일, 어버이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캐나다에서는 5월 둘째 주를 Mother's Day, 6월 셋째 주를 Father's Day로 지키는데 오늘 Mother's Day와 Father's Day를 합쳐서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우리 교회 엠마오회/사마리아인회 성도님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성도님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분들보다 더 건강하게 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장수의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모여 말씀듣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교제하면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치고 삶의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나이드신 성도님들에게는 교회가 신앙생활도 되고 취미생활도 되고 문화생활도 됩니다. 어린 아기부터 나이드신 성도님까지 모두가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청년들과 동포들과 어르신들이 모여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오시는 성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가 나이드신 성도님들을 잘 모시는 교회, 어른을 공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옛날 세대의 고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50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해외로 나간 경우가 첫 번째였고 해외에 강제로 끌려간 경우가 두 번째였습니다. 구한말에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 만주/북간도/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간 사람들도 있었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일하러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북쪽으로 어떤 사람들은 남쪽으로 가서 매서운 추위와 뜨거운 태양빛을 견디며 이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 식민지가 된 후에는 일제가 조선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100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노동자/학도병 징용으로 끌려갔고 8만 명의 여성들이 종군위안부로 끌려갔습니다. 1937년 스탈린이 극동 지방에 사는 고려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17만 명의 고려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알아서 하라고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고려인들을 내려다 놓았습니다. 허허벌판에 던져진 고려인들이 살아남아서 지금도 중앙아시아에 50만 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100여 년 전 자의로 또는 타의로 해외 이주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해외 이민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부모님, 조상들이 그런 험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아픔과 헌신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삭/야곱 같은 믿음의 조상들도 우리 조상들처럼 험난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땅이 중요한데 그들에게는 안전하게 거처할 땅이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고향 바벨론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중간쯤 되는 하란 땅에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 데라가 고향 바벨론을 떠나 가나안 땅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가난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바벨론 땅 보다 가나안 땅이 더 살기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바벨론 종교를 떠나 가나안 종교로 종교를 바꾸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중간에 정착한 하란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가족들을 데리고 원래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땅이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목축을 하기 위해 우물을 파면 그 지역 사람들이 와서 텃세를 부리고 우물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장소를 옮겨서 우물을 파면 또 그 지역 사람들이 와서 우물을 빼앗아갑니다.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안전하게 정착할 땅을 찾아서 이러저리 떠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2. 믿음의 조상들이 살았던 나그네 생활은 손자 야곱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7장을 보면 야곱이 흉년을 피해서 아들 요셉이 사는 이집트로 이민을 가서 바로 왕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왕이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그렇게 물으니까 야곱이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증조 할아버지 데라는 바벨론 땅에서 하란으로 거처를 옮겼고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가나안 땅에서 우물을 뺏겨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야곱도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떠도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증조 할아버지가 살았던 800km 떨어진 하란으로 가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살다가 말년에는 흉년을 피해 이집트 땅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130년 동안 험악한 세월을 보냈는데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대단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2014년에 나온 한국 영화 중에 천 만명이 보았다는 [국세시장]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51년 1.4 후퇴 때 7-8살 되었던 덕수라는 소년이 부모를 따라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다가 여동생을 놓치게 됩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기 위해서 배에서 내리고 결국 덕수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덕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찍부터 막노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20대 청년 시절에 돈을 벌기 위해 친구와 함께 독일로 가서 광부 생활을 합니다. 탄광이 무너져서 죽을 고비도 넘기고 결국 독일에서 한국 간호사를 만나 부산에 돌아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다가 동생들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술자로 베트남으로 가서 거기서도 또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렇게 힘들게 살던 덕수는 1980년대 KBS 이산가족찾기운동에서 극적으로 옛날 흥남 부두에서 미군에 의해 입양된 미국 사는 여동생을 만나게 됩니다. 덕수가 베트남으로 기술자로 가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하니까 부인이 반대합니다. 부부 싸움을 하는 중에 저녁 6시 애국가가 울리자 부부는 부부 싸움을 멈추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합니다. 저도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 그렇게 했습니다. 두번 다시 저런 옛날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요하는 그런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가 된 덕수는 자녀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이만 하면 잘 살았지요. 그동안 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할아버지 세대가 전쟁/가난을 거치면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잘 묘사했습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들은 부모님들이 힘든 세월을 살았음을 기억하고 감사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후손들이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모 세대들은 자녀 세대를 축복하고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부모 세대가 힘들게 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즘 젊은이들이 쉽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절반이 정규직이고 절반이 비정규직입니다. 청년들도 청년들 나름대로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어르신들을 존경하고 어르신들은 청년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어르신들이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는 후세대들이 풀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말년에 이르러서 두 가지 문제, 경제 문제와 가족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야곱은 이 가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었고 서로 싸우는 자녀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한 것도 아들 요셉이었고 형들과 먼저 화해한 것도 아들 요셉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나이드신 분들을 존경하고 나이드신 분들은 자신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젊은이들이 풀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젊은이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세상을 볼 때, 가능하면 젊은이들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은 젊은이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젊은이들을 격려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나이드신 분들을 더 잘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멀리 사시는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잘 해야 하지만 매주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여기고 잘 모셔야 하겠습니다. 잠언서 27장 10절에 보면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동생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을까요? 아마도 사랑하는 제자가 어머니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탁하셨을 것입니다. 맨 처음 교회는 나이드신 성도님들, 홀로되신 성도님들을 잘 섬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것 때문에 세상의 칭찬을 받았고 교회는 부흥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머니를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어르신들을 잘 섬기는 복된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Hard have been the years of my life
Genesis 47:7-12, John 19:25-27

Then Joseph brought his father Jacob and introduced him to the king. Jacob gave the king his blessing, and the king asked him, "How old are you?" Jacob answered, "I have lived only a hundred thirty years, and I have had to move from place to place. My parents and my grandparents also had to move from place to place. But they lived much longer, and their life was not as hard as mine." Then Jacob gave the king his blessing once again and left. Joseph obeyed the king's orders and gave his father and brothers some of the best land in Egypt near the city of Rameses. Joseph also provided food for their families. (Genesis 47:7-12)

Jesus' mother stood beside his cross with her sister and Mary the wife of Clopas. Mary Magdalene was standing there too. When Jesus saw his mother and his favorite disciple with her, he said to his mother, "This man is now your son." Then he said to the disciple, "She is now your mother." From then on, that disciple took her into his own home. Amen. (John 19:25-27)

Today is Mother's day. But we put together mother's day and father's day and want to call today "Parents' Sunday." Many people in Canada express their gratitude towards mothers and mother figures on Mother’s Day. It is the time for people to thank mothers and mother figures who took the time care for them and help them through life’s challenges. Father’s Day is also celebrated in Canada on the third Sunday of June, when people thank fathers and father figures for the positive contributions they made. Today we express sincere thanks to all parents, expecially mothers who are tired, stressed or depressed; who struggle to balance the tasks of work and family; who are unable to feed their children due to poverty; who raise children on their own; who have lost a child; who care for the children of others. We pray that God will bless all parents, that their love may be deep and tender, that they may lead their children to know and do what is good, living not for themselves alone, but for God and for others.

Young generation should respect old generation, while old generation should bless young generation. Although Jacob's years of life had been hard, he could not overcome two issues, poverty and family dispute. He had to rely on his son Joseph regarding these troubles in his later years. It is important to remember that sometimes young generation may solve the problems that old generation could not handle. When Jesus was crucified on the cross, Jesus asked his beloved disciples to take care Jesus's mother. Why did not Jesus asked his brothers to look after their mother? Probably Jesus asked because Jesus's beloved disciple lived close to Jesus's mother in Jerusalem. "Better is a neighbor that is near than a brother far off.“ (Proverbs 27:10). We pray that our church be the church that respects senior members and takes care of them. We pray that our church be the church that brings all people together and unites them into God's family of love and peac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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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다섯번째 주일 / 5월 첫번째 주일
욥기, 헛된 말을 하지 않게 하소서
욥기 13:12-18
정해빈 목사 



1. 지난 주일에 욥기 1, 2장, 42장 맨 처음 쓰여진 3장을 설명하면서 2가지 주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욥기는 우리의 삶이 매우 불안하고 흔들리기 쉽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욥은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였고 동시에 경건하고 신앙심 좋고 의롭고 깨끗하고 인간성 좋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경건하고 깨끗하고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욥에게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조심하면 막을 수 있는 재난이 있지만 반대로 아무리 내가 조심해도 막을 수 없는 재난이 있습니다. 평생 재산을 쌓았는데 한번의 실수로 재산이 다 날라가기도 하고 평생 건강관리를 잘 하면서 살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만큼 안전하지 않고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얼마 전에 TV 건강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미국의 건강한 젊은 여성이 갑자기 세균에 감염되어서 어쩔 수 없이 팔과 다리를 절단하고 인공 팔과 인공 다리를 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환경이 오염되면서 나쁜 세균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러면 내 몸 안에 있는 좋은 세균들이 뭉쳐서 나쁜 세균을 막아야 하는데 몸 안에 좋은 세균이 부족하면 나쁜 세균이 내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세균 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몸 안에 있는 세균을 무게로 재면 머리 무게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뱃속의 대장과 머리가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장에 좋은 유산균이 많으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고 장에 좋은 유산균이 부족하면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든다고 합니다. 요구르트나 야채를 많이 먹어서 몸 안에 좋은 유산균이 많아지게 해야 한다고 방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불안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지구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네팔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60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네팔은 힌두교를 믿는 나라라서 신들이 참 많은 나라인데 어느 신문에서 “그 많던 신들은 다 어디로 갔나” 이렇게 제목을 단 기사를 보았습니다. 욥기는 우리들의 개인적인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약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삶이 흔들릴 때 우리는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어쩌면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부서지고 깨지고 바닥으로 떨어져봐야 겸손을 배우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지만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반대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신명기를 보면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요단강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히브리 백성들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의 사명은 여기까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바울이 몸의 가시/질병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서 이 질병을 고쳐달라고 3번씩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네 은혜가 족하다” 이런 응답을 받고 질병을 고침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나 바울 이야기는 세상 일이 항상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높이 올라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진 물질/건강/명성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욥기는 잘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 욥기는 욥이 고난과 씨름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욥은 이런 대접을 받을바에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나라는 사탄과 아내의 말에 동의하지도 않았고 이 모든 것이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고난과 씨름했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렸습니다. 고난이 조상 탓이나 운명 탓이나 팔자 탓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때까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 씨름한 것처럼 욥도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 대답하십시오. 이 고난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습니까?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욥은 끝까지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의 대답을 듣기 원했습니다. 욥기는 고난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씨름하는 삶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세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2. 사람들은 보통 고난이 닥칠 때 그 고난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유를 모르면 답답하기 때문에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왔을까? 자꾸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자꾸 생각을 하다가 그럴듯한 해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를 생각해 냅니다. 이러저러해서 나에게 고난이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해하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꾸 해석을 하다보면 올바른 해석보다는 잘못된 해석을 하기가 쉽고 신앙적으로 옳지 않은 해석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는 고난을 운명이나 사주팔자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상은 본래 처음부터 각자가 정해진 길을 가도록 결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운명론입니다. 관상이나 손금을 통해서 그 사람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고난이 오면 내 사주팔자가 사나워서 이런 고난이 있나보다 생각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운명/사주팔자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정해진 운명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어떤 정해진 운명에 따라 우리를 지으셨다고 믿지 않습니다.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다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고난을 해석하는 가장 안 좋은 해석은 고난을 죄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받을 때 엘리바스/빌닷/소발이 찾아왔는데 첫 번째 친구인 엘리바스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모두 하나님의 입김에 쓸려 가고 그의 콧김에 날려 갈 것들이다.” (욥기4:7-9) 네가 망한 것은 죄 때문이라고 엘리바스가 말했습니다. 욥이 나는 이런 벌을 받을 만큼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니까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은 네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너의 자녀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 네 자식들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욥기8:3-4) 세 번째 친구인 소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너는 네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주님 보시기에 네가 흠이 없다고 우기지만 이제 하나님이 입을 여셔서 네게 말씀하시고 지혜의 비밀을 네게 드러내어 주시기를 바란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욥기11:4-6) 엘리바스/빌닷/소발 모두 죄 때문에 욥이 이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나쁜 해석이 바로 이런 해석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받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당신이 고난받는 것은 당신이 죄를 많이 졌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당신의 자녀들이 죄를 많이 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화가 나서 우리를 두 번 다시 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우리는 나의 소유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29-3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자기 것을 너무 자랑하면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 없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돈 자랑하지 말고, 건강한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생각해서 건강 자랑하지 말고, 자녀 있는 사람은 자녀 없는 사람을 생각해서 자녀 자랑하지 말고, 기쁜 사람은 고난받는 사람을 생각해서 기쁜 일을  너무 많이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배부를 때 배고픈 사람이 있음을 생각하고, 내가 기쁠 때 슬픈 사람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조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가진 건강/물질/명성이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보다 더 없는 사람을 생각해서 겸손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을 바라보는 두 번째 태도는 헛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 42장에서 욥은 “제가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회개를 했습니다. 하지만 욥보다 더 많이 쓸데없는 말을 한 사람들은 세 친구들이었습니다. 세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고난 앞에서 헛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막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래서 고난받는다 저래서 고난받는다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난받는 분들 곁에 가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고난 앞에서 헛된 말을 하지 않고 말없이 친구를 품어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Job, may we speak comfort not judgement
Job 13:12-18

If you were secretly unfair, he would correct you, and his glorious splendor would make you terrified. Your wisdom and arguments are as delicate as dust. Be quiet while I speak, then say what you will. I will be responsible for what happens to me. God may kill me, but still I will trust him and offer my defense. This may be what saves me, because no guilty person would come to his court. Listen carefully to my words! I have prepared my case well, and I am certain to win. If you can prove me guilty, I will give up and die. (Job 13:10-18)

In the Hebrew Bible, the book of Job is found in the third section, known as Ketuvim(Miscellaneous) writings, which follows the Torah and the books of the prophets. The three major presences in Ketuvim are sometimes referred to "books of truths," the spiritual truths of the Psalms, the practical truths of Proverbs, and the philosophical-theological insights of Job. The book of Job is composed of two parts: The first part is called the Fable of Job which is a very old, simple folktale of faith maintained and rewarded, found in chapthers 1, 2, and 42. The second part is the Poem of Job, a much later, more complicated work comprising the large middle section of the book. When bad things happened, Job did not leave God but wrestled with God. Moreover he never agreed with the fact that bad things come from the sins he had committed. While respecting God's sovereignty and goodness, and enduring many tragedies, Job waited until he meets God and everything is finally understood. In Chapter 42, God finally appears and chastises the friends for having spoken falsely about God. But God approves Job's attitude about sufferings. Job refused a guilty feeling when bad things happened to him. Rather he wrestled, faced, and fought against hardships. Surprisingly, God approved his brave attitude. The Fable of Job encourages us to face all trials, not surrender to them.

Job's three friends, Eliphaz, Bildad, and Zophar insisted that all the sufferings come from Job's sinfulness. They thought that God sent these trials to Job in order to waken him and to repent his or his families' wrongdoings. They also asserted that Job cannot object to God who is all-powerful. "If God wants to reprimand you, you should accept God's punishment." But Job did not agree with them. Job said, "My friends, I am desperate, and you should help me, even if I no longer respect God All-Powerful. But you are treacherous." (Job 6:14-15). Apostle Paul said in 1 Corinthians 7:29-31, "My friends, what I mean is that the Lord will soon come, and it won't matter if you are married or not. It will be all the same if you are crying or laughing, or if you are buying or are completely broke. It won't make any difference how much good you are getting from this world or how much you like it. This world as we know it is now passing away." Paul tells us that it is wise to live humbly because what we have is not eternal. Job would want his friends to weep together and comfort him truthfully. May we not judge those who are in the suffering. May may we speak comfort not judgement.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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