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아홉번째 주일 / 7월 네번째 주일
룻과 욥, 고난을 통과한 의인들

욥기 42:1-6, 10-11
정해빈 목사

 

 

 


1. 오늘 마지막으로 욥기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까지 6-7번에 걸쳐서 욥기를  설교했습니다. 계속 욥기만 설교하니까 좀 지겹다고 생각한 분들이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욥기를 길게 설교한 이유는 그만큼 욥기의 내용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내용이 어려우면서도 가장 수준 높은 신학 책이 한권 있는데 그 책이 바로 욥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경 66권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있습니다. 역사, 전기, 시, 예언, 편지, 설교 등의 책들이 있는데, 하나님/창조/자연/인간/죄/고난/선과 악과 같은 신학적인 문제를 깊이 다룬 책은 욥기가 유일합니다. 물론 요한복음이나 로마서 같은 책도 깊은 내용을 다루었지만 신학적인 무거운 주제들을 깊이 다룬 대표적인 책은 욥기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세계와 자연과 인간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도록 안내해 줍니다. 욥기는 우리들에게 왜 의인에게 고난이 있는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욥기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 세상을 바르게 보는 눈을 갖게 되고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구약 학자들 중에는 구약 39권 중에서 룻기/요나서/욥기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 3권이 없었더라면 구약 성경은 유대인들의 우월성/폐쇄성을 강조하고 자기 민족만 사랑하는 좁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수준 낮은 책이 될 뻔 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룻기/요나서/욥기가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유대인들의 우월성/폐쇄성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자기 민족만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넓으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 이 3권의 책이 우리들의 신앙을 넓혀 주었는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책은 룻기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남편을 잃은 후에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땅에 와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나오미의 친척 보아스를 만나 결혼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착한 며느리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착한 며느리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이방 사람입니다. 여기에 룻기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시하는 모압 여자 룻이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에 시집온 외국 며느리 집안에서 한국 대통령이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룻기는 자기 민족만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경종을 울립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다윗이 태어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소위 민족의 순수성을 유지한다는 명분하에서 유대 남자와 결혼한 이방 여인들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에스라/느헤미야는 이 신명기 말씀을 따라서 이스라엘 땅에 사는 이방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망한 것은 우리들이 이방 사람들과 섞여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지 나라 형편이 어려우면 외국 사람들을 배척하는 배타주의/국수주의/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외국에서 온 이민자/유학생/난민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룻기는 이러한 배타주의/국수주의/민족주의 운동에 경종을 울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룻과 같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룻기는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신앙을 넓혀주는 두 번째 책은 요나서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하고 반대 방향인 스페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뱃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신들에게 부르짖고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풍랑의 원인이 요나 때문이라는 것을 안 뱃사람들은 요나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약속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은 선지자 요나가 아니라 이방 사람 뱃사람들이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자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에 응답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살려두셨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하는 요나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가는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와 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원래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데 요나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한 사람들은 요나가 아니라 이방 사람들, 뱃사람들과 니느웨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래 니느웨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의 수도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니느웨 사람들을 증오하였습니다. 요나서는 놀랍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증오하는 니느웨 사람들도 회개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2. 우리의 신앙을 넓혀주는 세 번째 책은 욥기입니다. 욥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우스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5장을 보면 우스가 에돔 땅으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장 경건하다고 생각하는데, 놀랍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섬기고 하나님을 잘 믿은 착한 며느리 모압 사람 룻, 하나님께 회개한 착한 앗시리아 사람들, 그리고 가장 경건하고 부유한 에돔 사람 욥, 이렇게 룻기/요나서/욥기는 자기들이 제일 착하고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도전합니다. 욥기는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벌 받는다는 신명기의 가르침에 도전합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복을 받고 잘 섬기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신명기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욥이 고난받은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죄를 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욥기는 이러한 주장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착한 사람이 고난받은 것은 그 사람의 죄가 많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악해서도 아니고 사나운 인간과 사나운 자연이 있는 거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욥기는 말합니다. 욥기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가 욥기서 8장 7절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개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가게나 식당 같은 데 보면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은 욥이 한 말이 아니라 욥의 친구 빌닷이 한 말입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지만 나중에 크게 될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의 결과로 보아야지 이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믿는 목적이 나중에 크게 잘 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무당 종교와 다름없습니다. 만약 나중에 크게 잘 안되면 그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욥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중에 크게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욥기는 두 가지의 잘못된 신학, 첫째 인과응보의 신학, 사람이 고난받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많기 때문이라는 신학과 둘째 번영 신학, 하나님을 잘 믿으면 나중에 크게 성공한다는 번영 신학이 잘못된 신학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 때문에 고난받을 수도 있고, 정의를 위해서 일하다 고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중에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고 그 길이 옳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룻과 욥은 한때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지만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극복하고 통과해서 마침내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되고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꼭 이스라엘 사람만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 아니어도 룻과 욥과 같이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힘든 인생을 사는 분이 계시면 룻과 욥을 보면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욥기서 42장 마지막 장 말씀을 보면 욥의 가족/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을 축복하고 욥에게 금반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불평했지만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고난을 통과했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보는 눈이 더 깊어졌습니다. 욥은 인생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잘 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평생 바르고 진실되게 살았지만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많은 의인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나중에 잘 될 수도 있고 잘 안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이라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욥은 42장 6절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과 제 친구들이 한 말을 다 거두어들입니다. 지금까지 무지한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비록 나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위로가 됩니다.” 욥기는 이렇게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룻과 욥 모두 큰 고난을 받았지만 선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살았기에 마지막에 주님의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통과하여 마침내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의인이 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Ruth and Job, passing through hardships
Job 42:1-6, 10-11

Job said: No one can oppose you, because you have the power to do what you want. You asked why I talk so much when I know so little. I have talked about things that are far beyond my understanding. You told me to listen and answer your questions. I heard about you from others; now I have seen you with my own eyes. That's why I hate myself and sit here in dust and ashes to show my sorrow. (Job 42:1-6)

After Job had prayed for his three friends, the LORD made Job twice as rich as he had been before. Then Job gave a feast for his brothers and sisters and for his old friends. They expressed their sorrow for the suffering the LORD had brought on him, and they each gave Job some silver and a gold ring. The LORD now blessed Job more than ever; he gave him fourteen thousand sheep, six thousand camels, a thousand pair of oxen, and a thousand donkeys. (Job 42:10-12)

The book of Ruth, Jonah, and Job are well known as challenging parables against so called  orthodox Jewish traditions. They challenge the Jewish conservative faith based on exclusivism, racism, and superiority. For example, Ruth, the daughter-in-law of Naomi, came back with her from Moab to the land of Israel after the famine. She married Boaz and became the great-grandmother of King David. Although Ruth was not identified as an Israelite, but a moabite woman, she became an ancestor of king David. This story shows if Ruth was not accepted to the people of God, King David would not have been born. This book teaches us that our God exists beyond any racial prejudice and supremacy.

The book of Job opposes two Jewish traditional theologies; first is the theology of Deuteronomy which insists that if you are a good person, God will bless you. But if you are not a good person, God bill punish you. Second is the theology of success or prosperity theology which says that if you endure your hardships, then God will make you flourish. This theology also says that financial blessing is the will of God for Christians. But the book of Job says that the reason Job suffered is not because he was a sinner or God is cruel, but because Job is living in the world where wild people and nature have been ruling over. Like Ruth, Job was not an Israelite. He lived in the land of Uz where ammonite people had lived. Although there were not Hebrew people, Ruth and Job became righteous people startling in the sky. Job said in 42:6, I repudiate my past accusations, my doubts, even my anger, I have experienced the reality of God. I know that I am not alone, and, vulnerable mortal that I am, I am comforted.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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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여덟번째 주일 / 7월 세번째 주일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구나
마태복음 13:24 - 30
정해빈 목사

  

 

 


1. 지난 주일에 욥기를 설명하면서 욥이 고난받은 것은 욥이 죄가 많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악해서도 아니고 욥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뛰어다니는 거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베헤못(하마)는 사람의 힘/사나움을 가리키고 리워야단(악어)는 자연의 힘/사나움을 가리킵니다. 욥기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조용하고 착한 세상이 아니라 거칠고 사나운 세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착한 사람이 고통 받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나운 사람을 만났거나 사나운 자연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사나운 사람과 사나운 자연이 없다면 착한 사람이 고통받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자연이 거칠고 사나우면 가난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피해를 봅니다. 하지만 요즘은 과학이 발전해서 자연을 잘 연구하면 자연의 사나움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습니다. 자연 재해도 미리미리 대비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의 악입니다. 옛날 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사람을 잘못 만나면 사기를 당하거나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착한 사람이 고통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착한 사람을 골탕 먹이고 이용해 먹는 나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악한 제도를 만들고 악한 제도가 선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권력을 가지고 횡포를 부리는 권력자/독재자들, 사람들을 거짓으로 속이는 사기꾼들, 인터넷/전화/편지로 무엇에 당첨되었다, 세금을 적게 냈다고 전화해서 개인 정보를 빼가고 돈을 빼가는 사기꾼들, 끝없는 탐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나쁜 기업/금융인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착한 사람들이 피해를 봅니다. 최근에 카톨릭 교황이 남미를 방문해서 끝없는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오늘날의 악마/사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한 남미를 둘러보면서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인간성을 망치고 인류를 노예로 삼고 있다고 질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악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 때문에 욥과 같은 선한 사람들이 피해를 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실 때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거칠고 사나운 세상을 살 때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마태복음 10:16)”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슬기로움/지혜를 가리키고 비둘기는 온유함/순수함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보면 뱀은 간교함의 상징으로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혜의 상징으로 긍정적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간교함과 지혜의 차이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머리를 쓰면 간교함이 되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머리를 쓰면 지혜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거칠고 사나운 세상을 살 때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수함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둘기의 순수함 없이 뱀 같은 지혜만 있는 사람은 쉽게 간교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실/순수함이 없고 간교함과 술수만 있기 때문에 쉽게 타락할 것입니다. 반대로 비둘기 같은 진실/순수함만 있고 뱀 같은 지혜가 없는 사람은 거칠고 사나운 세상을 헤쳐 나갈 지혜가 없고 너무 순진하기 때문에 쉽게 쓰러지고 이용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살아야 하는 세상은 거칠고 사납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악과 불의와 폭력이 있습니다. 또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지혜와 순수한 마음 두 가지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 나오셨던 새가족 한 분이 자기는 북한에서 살 때에 아주 거칠고 사납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동네에서는 착하게 살고 양보하면서 살면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당하기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거칠고 사납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칠고 사나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부러 사나운 척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거칠고 악한 세상을 살지라도 비둘기 같은 온유함/순수함을 잃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 욥과 같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이 악하고 사나우니까 나도 살아남기 위해서 더 악하고 사나워져야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비둘기 같은 순수함/온유함을 잃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으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됩니다. 좋은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 그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이 땅이 거칠고 사납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땅에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좋은 씨앗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무조건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처음에는 길가에 떨어져서 새들이 쪼아 먹었고 두 번째는 돌짝 밭에 떨어져서 말라 버렸고 세 번째는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네 번째 떨어진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세 번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다면 그것은 착한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이 거칠고 사납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나운 사람과 자연이 뒤섞여 있는 세상을 지금 살고 있습니다.

미국 애틀랜타 에모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토마스 롱(Thomas G Long) 이라는 분이 쓴 [What Shall We Do]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글로는 [고통과 씨름하다]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부터 260년 전인 1755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리스본은 주민 25만 명 중에서 1/10인 2만 5천명이 신부/수사/수녀일 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경건한 도시였습니다. 그렇게 경건한 도시 리스본에 1755년 11월 1일 오전 갑자기 큰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최소 1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이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11월 1일은 만성절이라고 해서 하늘에 올라간 성인들을 기념하는 카톨릭 축제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제일을 맞아 성당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중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리스본 뿐만 아니라 1700년대 유럽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직접 조종하시고 통제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배 중에 일어난 지진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당시 유럽이 너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리스본을 심판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자연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윤리 도덕을 알지 못합니다. 그냥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거칠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175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유럽을 중세 시대와 근대 시대로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착하고 안전한 세상이 아니라 욥기에 나오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뛰어다니는 세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이 거칠고 사나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은데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주인의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이 말씀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악의 원인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라지는 원수/악이 뿌렸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라지를 뿌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분이 아니라 선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신앙에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겪는 아픔/질병/상처/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누가 망쳐놓았습니까? 악이 망쳐놓았습니다. 성경은 악이 이 세상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가라지가 뿌리 뽑힐 때까지 우리는 밀과 가라지가 섞인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고 벌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의 삶에 고통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일으키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An enemy scattered weed seeds
Matthew 13:24 - 30

Jesus then told them this story: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what happened when a farmer scattered good seed in a field. But while everyone was sleeping, an enemy came and scattered weed seeds in the field and then left. When the plants came up and began to ripen, the farmer's servants could see the weeds. The servants came and asked, "Sir, didn't you scatter good seed in your field? Where did these weeds come from?" (Matthew 13:24-27)

"An enemy did this," he replied. His servants then asked, "Do you want us to go out and pull up the weeds?" "No!" he answered. "You might also pull up the wheat. Leave the weeds alone until harvest time. Then I'll tell my workers to gather the weeds and tie them up and burn them. But I'll have them store the wheat in my barn." (Matthew 13:28-30)

Last Sunday, we had heard from the book of Job that Behemoth indicates the wild power of human beings, and Leviathan means the wild power of nature, the power of chaos and randomness. The Book of Job says that the reason Job suffered is not because he was a sinner or God is cruel, but because Job is living in the world where the wild human power and nature ruled over. That is why Jesus said when he sent out his disciples to the world, "I am sending you like lambs into a pack of wolves. So be as wise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Matthew 10:16) Jesus said, "be wise and innocent!" Being wise without innocent would make us sneaky, while being innocent without wise naive and weak.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when a farmer scattered good seed in a field. But while everyone was sleeping, an enemy came and scattered weed seeds. When the servants asked, 'Sir, didn't you scatter good seed in your field? Where did these weeds come from?' the farmer said, 'An enemy did this.'" This parable gives us some clues regarding the world we live. The scripture does not say clearly where this enemy came from, but it says obviously that these weed seeds did not come from God. All the sufferings we face did not come from God; they came from an enemy, the evil power. This fact gives us a solace to live the world. We are destined to live the world where good and weed seeds mixed together. But we are not afraid, since God did not sow an evil, but goodness. Although this world is not perfect, we are called to live and grow in the vulnerable world, since God is with u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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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일곱번째 주일 / 7월 두번째 주일
욥기, 베헤못과 리워야단
욥기 40:15 - 41:3
정해빈 목사


1. 한평생 바르고 의롭게 살았던 욥은 자신이 받은 끔찍한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로 씨름한 욥이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님은 선하거나 자비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바쁘셔서 나 같은 사람이 억울하게 고통받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거나 아니면 원래 하나님이 잔인하고 난폭하셔서 자신이 지은 피조물을 아무 이유 없이 고난에 빠트리기도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자니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내가 이런 하나님, 너무 바쁘거나 아니면 너무 잔인하고 난폭한 하나님을 믿어왔던가? 욥의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욥은 정말 하나님이 이런 분이 맞는지 저 세상에 가서라도 꼭 하나님을 만나 대답을 듣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욥의 이러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욥과 같은 경우에 처했다면 우리들도 욥과 같이 혼란스러워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했을 것입니다. 한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았는데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실패한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욥기에 나오는 3가지의 주장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1번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2번은 하나님은 선하시다, 3번은 욥은 의인이다. 욥의 고난을 설명하려면 3가지 주장 중에서 하나를 부정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3번을 부정했습니다. 욥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욥이 완벽한 사람은 아닐 지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욥이 죄가 많아서 고난을 받는다는 친구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 됩니다. 욥은 2번을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한 분이시라면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고 전지전능하시고 힘이 센 분이지만 착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한 욥은 결국 2번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고난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심술을 부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잔인하고 괴팍한 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무고한 사람을 시험에 빠트리는 분이시구나, 내가 하나님께 잘못 걸렸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세가지 주장 중에서 1번을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욥이 고난받은 것은 하나님이 악해서도 아니고 욥이 죄인이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그런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힘이 세고 무엇이든지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세상 모든 일을 당신의 뜻대로 관리/통제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창조주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은 부모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영원토록 부모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식을 앉혀놓고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 어린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듣겠지만 다 큰 자식을 앉혀놓고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계속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다 큰 자식이 마마보이가 되어서 사사건건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의 허락을 받으며 살아간다면 그 자식은 부모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에 빠트리는 악한 분도 아니고 세상 모든 일을 통제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분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는 선한 분이십니다.

2. 욥이 고통받고 있을 때 욥의 3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서 욥을 위로하고 욥의 고난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들이 나를 찾아와 준 것은 고맙지만 그대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는 4번째 친구 엘리후가 와서 욥의 고난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4명 모두 욥을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4명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전통적인 지혜에 근거해서 욥의 고난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대를 시험하시니까 이 시험을 잘 참으면 나중에는 잘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욥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죄 때문이라면 내가 무슨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냐고 따졌고, 시험 때문이라면 내가 이런 끔찍한 시험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욥과 4명의 친구들 사이에서의 긴 대화가 끝난 후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기 38장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질문에 대해서 크게 2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첫 번째 대답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내가 세상을 지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우리 머리로 이해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8장-39장에서 첫 번째 대답을 하셨고 40장-41장에서 두 번째 대답을 하셨습니다. 40장-41장을 보면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나옵니다. 베헤못은 하마를 가리키고 리워야단은 악어를 가리킵니다. 학자들은 40장-41장에 하마와 악어가 나온다고 해서 이 장을 악어 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욥기서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40장-41장, 악어 장 속에 숨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장 사납고 무서운 동물을 가리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자를, 아시아 사람들이 호랑이를 가장 사납다고 생각한다면 중동 사람들은 하마와 악어를 가장 사납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20세기 유대교를 대표하는 랍비 헤롤드 쿠슈너(Harold S. Kushner)는 베헤못은 인간의 사나움을 가리키고 리워야단은 자연의 사나움을 가리킨다고 말했습니다. 베헤못은 인간의 사나움 또는 잠재력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화가 나면 때로는 무서운 하마처럼 변하기도 합니다. 하마가 힘이 아주 쎈 것처럼 사람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무한한 잠재력을 선한 곳에 쓰면 기술을 개발하고 질병을 고칠 수 있지만 그 잠재력을 나쁜 곳에 쓰면 핵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자신의 잠재력을 어디에 쓸지 스스로 선택하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리워야단은 사나운 자연을 가리킵니다. 악어가 이리저리 난폭하게 뛰어다니는 것처럼 자연도 때로는 난폭하게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에게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도덕과 상관없이 자연의 법칙대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잘못 만나면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해를 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난폭한 자연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일부분입니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우리도 세상을 살다보면 욥과 같은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잠재력을 잘못된 곳에 써서 고난을 자초할 수도 있고 사나운 자연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강도떼가 욥의 가축들을 도적질해 갈 수도 있고 자연재해를 만나 가족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악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욥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뛰어다니는 사나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토론토 북쪽 Wonderland 놀이공원에 가면 가장 높고 무서운 놀이기구 이름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입니다. 10대-20대 청년들은 탈 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은 너무 무섭고 어지러워서 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가장 무섭다는 뜻에서 욥기에 나오는 사나운 짐승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나운 동물들을 만드셨을까요? 악이 없는 세상을 만드셨다면 우리는 고통없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주어진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있는 인생이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유도 없고 시련도 없고 도전도 없는 인생은 지루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선과 악, 거친 자연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토인비는 인류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과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악과 자연의 악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과 악 중에서 악을 선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악을 선택하면 할수록 억울한 사람들이 더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악을 선택한 사람 잘못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이 거친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잠재력을 선을 위해 쓸 때 이 세상에서 억울한 사람들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억울하게 고난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사납고 악한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바꾸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Job, Behemoth and Leviathan
Job 40:15 - 41:3

‘Look at Behemoth, which I made just as I made you; it eats grass like an ox. Its strength is in its loins, and its power in the muscles of its belly. It makes its tail stiff like a cedar; the sinews of its thighs are knit together. Its bones are tubes of bronze, its limbs like bars of iron. ‘It is the first of the great acts of God - only its Maker can approach it with the sword. For the mountains yield food for it where all the wild animals play. Under the lotus plants it lies, in the covert of the reeds and in the marsh. The lotus trees cover it for shade; the willows of the wadi surround it. Even if the river is turbulent, it is not frightened; it is confident though Jordan rushes against its mouth. (Job 40:15-23)

‘Can you draw out Leviathan with a fish-hook, or press down its tongue with a cord? Can you put a rope in its nose, or pierce its jaw with a hook? Will it make many supplications to you? Will it speak soft words to you? Will it make a covenant with you to be taken as your servant for ever? Will you play with it as with a bird, or will you put it on a leash for your girls? Will traders bargain over it? Will they divide it up among the merchants? Can you fill its skin with harpoons, or its head with fishing-spears? Lay hands on it; think of the battle; you will not do it again! Any hope of capturing it will be disappointed; were not even the gods overwhelmed at the sight of it? (Job 41:1-9)

Long after having listened to the complaints of Job and the dispute between Job and his 4 friends, Eliphaz, Bildad, Zophar, and Elihu in chapter 3 to 37, God finally showed up and responded to Job's question, such as why do good people suffer in God's world? Did I deserve to be miserable? Did you allow this tragedy to happen to me because you are a furious and cruel God? God's first answer is that you, a creature, cannot fully understand the wisdom of God, the Creator. We do not know fully how God created and manages the world. It means that there are some mysteries in the world that we cannot understand completely. God said in chapter 38, "where were you when I laid the earth's foundation?"

It is God's second answer, however, that makes us surprised. God said to Job, "look at the two most ferocious and dangerous animals that I created in the world." Literally speaking, Behemoth means a hippopotamus and Leviathan a crocodile. But spiritually speaking, Behemoth means the free power of human being to choose good or evil, while Leviathan indicates the power of nature, the power of chaos and randomness. These creatures represent forces of the created world with which even God is challenged to contend. They are responsible for most of the misery in the world, most of the bad things that happen to people who deserve better. The Book of Job says that the reason Job suffered is not because he was a sinner or God is cruel, but because Job is living in the wild world where the human power and nature ruled over. God gave us freedom to lead the world as we wish. If we make a right decision and take care of innocent victims, this world become more reliable.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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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여섯번째 주일 / 7월 첫번째 주일
욥기, 선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욥기 19:25 - 27; 23:1 - 7
정해빈 목사

 

 

 


1. 세상을 살다보면 이해 안 되는 일들이 많을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자연재해, 생로병사, 사고와 질병을 겪을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원인없는 일이 벌어질 때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세상일을 아는 지식이 많아졌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구 끝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바다 끝에는 절벽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지구가 동그랗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과학자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말했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교황으로부터 심문을 받고 자기 소신을 취소했던 갈릴레오는 법정을 나가면서 혼자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과학이 발전할수록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진실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 우리는 과거의 무지와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 안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나중에 이해되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도 여전히 이해 안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신앙은 영적이고 신비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종교에는 반드시 영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덮어놓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머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가슴이 믿을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 안 되는 것을 가슴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믿는 것을 머리로 이해할 때 더 잘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묻고 질문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더 풍성해 질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가장 이해 안 되는 본문 중의 하나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맨 처음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어떻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자식을 죽여서 불로 태워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들은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너는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자식을 더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위해 하나뿐인 자식을 바칠 수 있느냐? 이렇게 시험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물질, 재물, 건강,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잘 통과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본문이 고대 중동 지방에 있었던 자식을 신에게 바치는 악습에 대한 히브리 사람들의 신앙 고백을 기록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식을 바치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을 시험해서 자식을 바치라고는 했지만 자식을 죽이려는 순간에 등장해서 자식을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약간 다른 관점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2장 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3일을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실까? 내가 자식을 너무 사랑하니까 질투가 나셨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식을 죽여 불로 태워 바치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 이런 하나님을 내가 믿어야 하나?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인가 아니면 선하신 분인가?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런 갈등을 하면서 3일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어느 집에 아주 자비롭고 인자하신 아버지가 한분 계셨습니다. 평생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나 싫은 소리 한번 하신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식들을 불러놓고 “이유를 묻지 말고 내가 돈이 필요하니까 천만원 내 앞으로 가지고 와라” 말을 합니다. 자식들이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저럴 분이 아닌데 왜 저런 말을 하실까? 이제껏 한 번도 저런 요구를 하신 적이 없는데 왜 저런 요구를 하실까? 아버지가 갑자기 변하셨나? 나이드시더니 노망이 드셨나? 자식들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와 비슷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런 요구를 하실 분이 아닌데 왜 저런 요구를 하실까? 왜 갑자기 선하신 하나님이 잔인한 하나님이 되셨을까?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런 고민을 하면서 3일을 말없이 걸어갔을 것입니다.

2. 우리가 욥기서에 보는 욥의 질문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실까? 내가 누구보다도 의롭고 바르게 살았는데 왜 이런 고난을 주실까? 욥의 질문도 아브라함의 질문과 비슷했습니다. 욥기와 관련하여 3가지의 주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번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주장이고 2번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주장이고 3번은 욥이 의인이라는 주장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3번이 틀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욥이 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욥이 당대의 의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욥이 지은 죄가 많아서 고난을 받았다면 욥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욥도 이와 비슷한 말을 친구들에게 했습니다. 나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면 내가 무슨 죄를 얼마나 크게 졌다고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항변했습니다. 욥은 이 세상에서 가장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주장 3번은 틀린 것이 됩니다.

욥은 2번이 틀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선하시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은 세지만 착하지 않고 잔인한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면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힘은 세지만 선하시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내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을 한번 시험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으셨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착한 분이 아니라 힘센 분이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억울하다고 외쳐도 하나님은 피조물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의 마음이 더 괴로웠습니다. 하나님, 정말 당신은 잔인한 분이 맞습니까? 당신은 이제 보니 피조물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분이셨습니다. 욥은 마지막에 내 육체가 없어질지라도 꼭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정말 잔인한 분인지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대답을 듣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욥의 주장대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만 선하지 않기 때문에 욥이 고난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욥이 고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욥의 고난을 설명하려면 1번을 부정하거나 2번을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1번과 2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까요? 힘은 세지만 착하지 않은 하나님? 아니면 힘은 없지만 착한 하나님? 이렇게 질문하면 힘도 세고 마음도 착한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되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다 선택하면 욥의 고난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힘이 세거나 마음이 착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욥의 생각과 정반대로 2번을 선택하고 1번을 부정할 수는 없을까요? 하나님은 힘이 세고 괴팍한 분이 아니라 착하신 분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잔인하고 난폭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셔서 우리의 고통을 보며 함께 아파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선하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분이십니다. 다른 것은 포기해도 이것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전지전능하고 힘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처럼 힘을 갖으려고 합니다.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억누르려고 합니다. 나는 힘이 있고 너는 힘이 없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년 전에 유럽의 기독교가 아프리카에서 1000만 명의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서 아메리카로 끌고 갔습니다. 힘 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전지전능하고 힘 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도 힘 센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도 하나님처럼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 고통받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Job, God is good and righteous
Job 19:25-27; 23:1-7

My best friends and loved ones have turned from me. I am skin and bones-- just barely alive. My friends, I beg you for pity! God has made me his target. Hasn't he already done enough? Why do you join the attack? I wish that my words could be written down or chiseled into rock. I know that my Savior lives, and at the end he will stand on this earth.  My flesh may be destroyed, yet from this body I will see God. Yes, I will see him for myself, and I long for that moment. (Job 19:19-27)

Job said: Today I complain bitterly, because God has been cruel and made me suffer. If I knew where to find God, I would go there and argue my case. Then I would discover what he wanted to say.  Would he overwhelm me with his greatness? No! He would listen because I am innocent, and he would say, "I now set you free!" I cannot find God anywhere-- in front or back of me, to my left or my right. God is always at work, though I never see him. But he knows what I am doing, and when he tests me, I will be pure as gold. (Job 23:1-10)

When God spoke to Abraham, "take your Son Isaac to the land of Moriah and you must sacrifice him to me on the fires of an altar," Genesis 22 says that Abraham got up early the next morning and chopped wood for the fire. He put a saddle on his donkey and left with Isaac and two servants for the place where God had told him to go. Three days later Abraham looked off in the distance and saw the place. Although he responded to the order of God instantly, God's message would be a big shock to him. How could God say to me like this? What kinds of God do I believe? What kinds of God could say to kill my only son? Abraham would be in great confusion while he walked up to the mountain for three days. These questions seized him for 3 days. Abraham wanted to know what types of God he believe.

When Job faced the tragedy that he had never experienced before, he had the same question about God as Abraham had in mind. Where did this severe suffering come from? According to the Book of Job, we are invited to deny one out of three points to explain the hardship of Job. First, God is powerful; second, God is good; third, Job is a righteous person. Job's three friends negate the third points whereas Job denies the second points. According to their perspective, Job suffers because Job is a sinner or God is not good but powerful and omnipotent. They thought that the suffering came from Job's sinfulness or God's free will. But We cannot deny the second point that God is good. The scripture says repeatedly that God is good and generous. Job's suffering comes from neither Job is sinful nor God is cruel and powerful. Rather God is with us when we weep and cry. Do not think that everything comes from God. Rather God is always here to help us. Amen.

Posted by 정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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